Monday, June 23, 2014

중국 황실의 성문화

중국의 황제들, 삼천궁녀와 이렇게 잤다
  ≪예기·곡례≫하편에는 「天子有后, 有夫人, 有世婦, 有嬪, 有妻, 有妾(천자에게는 후(后)가 있고, 부인(夫人)이 있고, 세부(世婦), 빈(嬪), 처(妻), 첩(妾)이 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천자의 정실부인을 후(后)라 하고, 부인(夫人)이하 첩(妾)까지는 모두 천자를 모시는 여인들의 등급이다.
또한 천자에게는 부인이 세 사람, 빈이 아홉 사람, 세부가 27명, 어처가 81명이며(天子后立六宮, 三夫人, 九嬪, 二十七世婦, 八十一御妻), 첩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흔히들 그 수효를 삼천궁녀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실로 천문학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림 / 궁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당나라 태종)
그렇다면, 중국의 역대 제왕(帝王)들은, 이토록 많고 많은 후궁(後宮) 비빈(妃嬪)들과의 무리없는 스케줄(?) 안배를 위하여 어떤 규칙을 적용하였을까?
주(周)나라 때의 사람들은 천체(天體) 음양(陰陽) 역수(曆數) 등으로 일의 순서를 결정하였으며, 심지어는 비빈과 제왕의 데이트 순서까지도 달(월/月)의 흐리고 맑은 것이나, 차고 기우는 것, 즉 음청원결(陰晴圓缺)에 의하여 결정하였다.

이른바 달의 음청원결(陰晴圓缺)이란, 달이 매월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점점 차올랐다가 보름에서 그믐날까지의 15일 동안 점점 기우는 것을 말한다. 제왕과의 동상(同床)은 이러한 원칙에 근거하여 이루어졌는데, 초하루에서 보름까지는 지위가 낮은 궁녀에서 시작하여 지위가 높은 비빈이나 정실(正室)로 안배하였으며, 보름을 기준으로 다시 지위가 높은 비빈부터 시작하여 점점 지위가 낮은 궁녀를 배열하였다.

황후(皇后)와 세 명의 일품(一品)부인들은 절대적인 우선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구빈(九賓)이하에 이르면 모두 아홉 명이 함께 황제를 모시고 잠을 자게 되어 있었다. 한 남자와 아홉 명의 여자가 함께 잔다면 도대체 어떻게 자야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일단, 규정에 의한 황제의 잠자리 배정표(?)을 정리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01일-09일(9일동안) : 81명의 어처(御妻)들이 매일 밤 9명씩 1개조가 되어 동침(同寢)
   10일-12일(3일동안) : 27명의 세부(世婦)들이 매일 9명씩 1개조가 되어 동침(同寢).
   13일(1일동안)      : 구빈(九賓)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4일(1일동안)      : 삼부인(三夫人)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5일(1일동안)      : 황후(皇后) 혼자서 동침(同寢).
   16일(1일동안)      : 황후(皇后) 혼자서 동침(同寢).
   17일(1일동안)      : 삼부인(三夫人)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8일(1일동안)      : 구빈(九賓)들이 돌아가며 동침(同寢).
   19일-21일(3일동안) : 27명의 세부(世婦)들이 매일 9명씩 1개조가 되어 동침(同寢).
   22일-30일(9일동안) : 81명의 어처(御妻)들이 매일 밤 9명씩 1개조가 동침(同寢).
한달 동안, 황후, 삼부인(三夫人), 구빈들은 이틀 밤을 황제와 함께 보낼 수 있고, 세부(世婦)들은 여섯 밤을, 어처(御妻)들은 열여덟 밤을 보낼 수 있다.
이러한 분배방식은 비빈들의 간의 갈등을 줄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만약 황제가 특정된 아홉 여성에게만 관심을 갖게된다면 나머지 비빈들은 할 일이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비빈들의 입장에서 보면 유리하지만, 황제의 입장에서 보면 좋을 것도 없다. 동침할 상대를 강제적으로 규정한 것은 아무래도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를 자기의 취향에 맞추어 자유롭게 고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황후가 매일 밤 황제와 동침(同寢)해야 했다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황후는 닷새 걸러 하루를 쉬게 되는데, 쉬는 날은 다른 비빈(妃嬪)들이 근무(?=동침(同寢))를 하였다.
때문에, 아홉 비빈들은 45일이 지나야 비로소 한번의 기회가 오게 되었으며, 세부(世婦) 이하의 여인들은 반드시 아홉 비빈들을 따라 함께 황제의 시중을 들어야 했고, 단독으로 황제를 대면할 수는 없었다.

주나라 때의 각 제후(諸侯)들도, 닷새 만에 한번 기회가 주어지는 이러한 제도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제후들에게는 모두 9명의 아내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정실부인 한 사람을 제외한 8명의 측실(側室)들은 갑을병정(甲乙丙丁)의 4개 조로 나뉘어 매일 밤 정실 부인을 따라서 근무하거나, 다른 두명의 측실을 따라 근무하였다.
통상, 50세 이하의 측실이라야 군주와 동침(同寢)할 권리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는 이러한 여성이 아직 회임(懷妊)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측실로서 50이 넘으면 다시는 군주와 동침할 수 가 없었는데, 이 역시 회임의 가능성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제한은 측실들에게만 적용되었으며, 정실부인은 50이 넘어도 남편인 군주와 동침할 수 있었다. 정실부인은 70이 넘어 성적 능력을 상실할지라도 여전히 남편과 밤을 보낼 수가 있었다.

대부(大夫)의 경우, 처첩의 수는 제후의 3분의1로서 1처2첩이었으며, 3일을 주기로 하였다.
일반 사족(士族)들은 1처1첩만이 허용되었는데, 처와 첩의 자격에는 차이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처는 밤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남편과 동침할 수 있었지만, 첩은 반드시 주군(主君)이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잠이 들면 방을 떠나야 했다.

이렇듯, 주군(主君)을 모시는 순서에도 나름대로 규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사람으로서 병이 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며, 어떤 때는 생리(生理)를 맞을 수도 있으며, 황제와의 하룻밤을 기다리는 비빈(妃嬪)들의 숫자가 사실 엄청나게 많았던 게 현실이었다.
때문에, 이러한 복잡한 점을 고려하여 황제의 동침 스케줄을 안배하는 「여사(女史)」라는 관직도 생겨났다.
먼저, 여사(女史)는 비빈들에게 금(金) 은(銀) 동(銅) 등의 각기 다른 재질로 만든 반지를 끼게 함으로써 주군을 모실 순서를 구별하였으며, 비빈들의 일상 행동을 관찰·기록하여 순서 결정의 참고 자료로 활용하였다.
이밖에, 생리 중인 여성은 반드시 양볼에 붉은 색을 칠하여 자신의 신체 상태를 표시하여야만 하였다고 한다.
황제의 침소에 들기 전에 무얼 준비하나  
황제를 모시고 잠자리에 들게 되는 여성은 먼저 다음과 같은 준비를 하여야 했다.
먼저, 목욕과 양치질을 하고, 머리의 장식을 없애고 머리를 단정하게 빗은 다음, 검은 색 비단으로 싸서 어깨 위에 놓고, 앞머리는 눈썹 위까지 내려뜨렸다.
이러한 헤어스타일은 여성들을 15세 이하의 소녀처럼 보이게 하여 청순가련함을 돋보이게 하였으며, 동시에 자신의 비천함(겸손)을 표시하였다.

비빈(妃嬪)들의 성명, 생년월일, 평소의 행동거지 등은 모두 "여사(女史)"에 의하여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은 모두 비밀을 요하는 것으로서 공개할 수 없었다. 훗날, 일부 폭군들은 자신의 악행이 여사들에 의하여 기록되는 것이 두려워, 이러한 관직을 없애 버렸다.
비빈들이 황제의 침실에 들어가게 되는 상황은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비빈들이 황제의 침궁으로 갈 때에는, 시녀들은 비빈의 앞뒤에서 등을 들고 길을 안내하였다. 황제의 침궁에 도착하면, 비빈은 곧 모든 옷을 벗고 매미 날개처럼 얇은 잠옷으로 갈아  입었다. 시녀들은 옆방에 들어가서 밤을 세웠다.
이튿날 닭이 울면,
대사(大師)라는 관리가 와서 침궁 밖의 계단에서 닭이 울었음을 고하였다.
비빈은 곧 방안에서 옥으로 된 장식을 서로 부딪쳐 소리를 냄으로써 대사에게 "잘 알았다"는 표시를 하며, 그를 그만 물러가게 하였다.
이어, 소사(小師)가 계단 아래에 와서 비빈을 향하여 "날이 밝았습니다"라고 고하면, 비빈은 곧 잠옷을 벗고 원래의 옷으로 갈아 입었다. 만약 황제의 시침을 든 여성이 황후라면,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잠시 기다렸다가 황제와 함께 조정으로 향하였다. |
옛날에는 조정의 조회(朝會) 시간은 매우 일렀으며, 문무백관들은 한밤중에 일어나 입궐 시간을 기다려야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음행(淫行)을 즐겼던 일부 황제들은 밤을 세워 욕정을 불태웠으므로, 새벽에야 잠이 들어 조회 시간에 맞출 수가 없었다. 이처럼 조정의 일에 소홀한 황제는 "혼군(昏君)"이라 불렸으며, 이들은 자주 나라를 분란의 위험 속으로 몰아넣곤 하였던 것이다.
주나라 선왕(宣王)은 왕위에 있을 때, 새벽잠이 너무 많아서 일찍 일어나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이에 강왕후는 자신의 머리와 몸에 걸쳤던 모든 장신구들을 벗어버리고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다.
"왕께서 잠을 탐하여 일어나지 않으려 하시는 것은 모두 저 때문에 생긴 일이오니, 저는 왕을 대신하여 직무에 태만하였던 것에 대한 징벌을 받고자 합니다."
이에 선왕은 크게 뉘우치고, 다시는 늦잠을 자지 않고 매우 일찍 조회에 참석하였다.
선왕은 영명한 군주로서 국력을 강성하게 하였으며, 훗날 "선왕중흥(宣王中興)"이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서진(西晉) 무제(武帝)의 예를 들면, 그는 매번 양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육궁(六宮)을 순회하며 마음에 드는 비빈을 골랐다. 그는 즉위 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공포한 적이 있었다.
"집안에 딸이 있는 자들은 즉각 보고하도록 하라. 사실을 숨기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할 것이다. 모든 여성들은 선발 조사 과정이 완료되기 전에는 출가하는 것을 금한다."

이렇게 하여 선발되어 입궁하게 된 미녀들은 5천이 넘었다.
얼마 후 서진이 오(吳)나라를 멸하고 오나라 후궁에서 접수한 궁녀가 다시 5천에 달했으므로, 궁중에는 모두 1만명의 미녀들이 있게 되었다.
수많은 궁녀들 가운데에서, 무제는 다시 수백 명의 절세미녀를 고르고 골라냈다. 하지만, 사람의 숫자가 너무 많아, 그는 어떻게 골라야 좋을지를 잘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하여, 그는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내게 되었는데, 바로 3-4 마리의 양들이 끄는 수레를 타고 육궁을 순회하는 것이었다.
양들이 멈추는 곳은 바로 그가 미녀를 고르는 곳이 되었다. 황제에게 뽑히고 싶은 비빈들은, 양들이 가장 즐겨먹는 대나무 잎에 소금물을 뿌려 자기의 방문 앞에 놓아두고 양들이 자신들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멈춰주기를 바랐다.
수나라 양제(煬帝)는 미녀들을 미궁(迷宮)에 두고 즐겼다고 한다.
한번은, 양제가 문선루(文選樓)를 순시하게 되었는데, 수천 명의 궁녀들이 누각 위에 서서 그를 영접하였다. 그때 마침 미풍(微風)이 불자, 많은 궁녀들의 옷이 바람에 휘날렸다.

누각 아래에 서 있던 양제는 궁녀들의 벌거벗은 하반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게 되었다.궁녀들은 황급히 손으로 옷을 눌렀으나, 양제는 자신이 보았던 것을 잊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양제는 미궁을 건축하도록 명을 내리고, 수천명의 미녀들을 골라 그들에게 모두 얇은 적삼만을 입고 미궁 위에 서있게 하였던 것이었다. 바람이 불면 미녀들의 적삼은 바람에 따라 날리며 하얀 몸통을 드러냈으며, 양제는 곁에서 이를 감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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