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uly 30, 2019

아이러브스쿨

500만 명 가입한 '아이러브스쿨' 창업자 김영삼

2000년. 그야말로 벤처 광풍이었다. 한 해 동안 벤처 3864곳이 창업했다. 창업투자회사가 쏟아 부은 돈은 2조211억 원. 미래 가능성만 보고 투자하는 에인절 투자도 5493억 원에 달했다. 네이버, 옥션, 싸이월드 등 현재도 인기 있는 인터넷 사이트 대부분이 당시 벤처 붐을 타고 자리 잡았다. 그중에는 프리첼, 다모임처럼 화려하게 등장했으나 현재는 명맥만 이어가는 사이트도 많다. 특히 1999년 한국 최초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표방하며 1년 만에 회원 500만 명을 모았던 '아이러브스쿨' 창업자 김영삼(44) 씨는 모든 걸 잃고 20억 원대의 미납 세금을 껴안은 채 살고 있다.

최근 11년간, 그의 인생은 끝을 모르고 곤두박질쳤다. 사기, 신용불량, 세금연체, 연이은 사업 실패, 이혼, 그리고 건강 악화까지. 3월 2일 서울 구로구 한 법률사무소에서 만난 김 씨는 "호접몽(胡蝶夢)이라는 말 아세요?"라며 대화를 시작했다.
"제가 꿈을 꾼 건지, 시대가 꿈을 꾼 건지 모르겠습니다. 목표 없이 시작한 사업이 갑자기 커버리고 그 뒤만 쫓아다니다보니 결국 저는 20억대 채무자가 돼버렸어요. 그 모든 일이 아득하고 부질없게 느껴져요."
1999년 가을, 김 씨는 카이스트 경영정보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었다. 그때 형용준, 정태석 씨 등 연구실 옆자리 친구들이 벤처 '싸이월드'를 만들었다. 김 씨는 '사람을 모으려면 학연이 최고인데…' 생각하다, '그렇다면 내가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다. 당시 같은 연구실에 있던 이충석, 최병구 씨와 함께 50만 원씩 모아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최 씨는 가족의 반대로 사업에서 발을 뺐고 이후 창업 과정에서 삼성전자 출신 임준규, 성기범 씨가 합류했다.
"사람 모으려면 학연이 낫다" 가볍게 시작
회원이 점차 늘어가자 서버 확충이 시급했다. KTB와 금양에서 투자 의향을 밝혔다. 당시 아이러브스쿨 회원은 1만 명. 김 씨는 두 회사에 "10억 투자하면 지분 40%를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결국 금양의 투자를 받았다. 금양은 발포제 및 관련 제품을 주로 만드는 화학공업업체로 1955년 부산에 설립된 중소기업이다.
아이러브스쿨은 '친구 찾기 열풍'을 선도하며 회원 수가 급격히 늘어갔다. 2000년 5월 25만 명을 돌파했다. 이후 한 달에 100만 명꼴로 회원 수가 늘었고 금세 회원 수 500만 명을 넘어섰다. 2000년 10월에는 세계 인터넷 사이트 방문자 순위를 매기는 '알렉사' 사이트에서 한국 2위(1위는 야후코리아)까지 올랐다. 토종 한국 사이트로서는 늘 1위였던 '다음'이 처음으로 1위 자리를 빼앗긴 것.
야후코리아가 아이러브스쿨을 500억 원에 인수하려 했고, 초기에는 추가 투자를 거절했던 금양도 "500억 원에 인수하고, 경영권까지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지분 40%를 가진 금양 측의 거절로 야후코리아 인수는 실패했고, 창업주들은 금양에 회사를 넘기기로 결정했다.
2000년 9월 창업주 4명은 당시 금양 대표이사 정현철 씨와 계약을 맺었다. 아이러브스쿨에 대한 금양의 지분을 51%로 늘려 경영권을 확보한 뒤, 정 씨는 창업주들의 보유 주식을 개인적으로 매수하겠다고 밝혔다. 정 씨는 창업주 4명의 지분 32%를 개인적으로 매수했고, 매수대금 약 160억 원은 2001년 1월과 3월에 지급하겠다고 했다. 지급 기일이 됐지만 정 씨는 "시장 상황이 어렵다"며 지급 기한을 1년 늦춰줄 것을 요청했다.

↑ 아이러브스쿨 사이트.
2001년 11월 1일 정 씨는 본인 및 금양 보유 아이러브스쿨 지분 전량을 서울이동통신에 매각하고 그날 오후 홍콩으로 몰래 출국했다. 김 씨를 제외한 창업주 3명은 담보로 받아놓은 금양 측 어음 덕분에 50억 원을 변제받았지만, 김 씨는 담보 없이 계약서 한 장 달랑 가지고 있었다. 김 씨는 "당시 사업 경험이 없어 어수룩했고 '사업에서 빨리 손 털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코스닥 상장사 사장이자 대주주인 정 씨가 설마 내 돈을 안 갚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선 지급받은 20억 원을 제외하고 매매대금 73억 원과 정 씨에게 빌려준 10억 원, 총 83억 원을 떼이게 됐다. 민·형사상 소송을 했지만 정 씨는 이미 행방불명 상태. 형사 소송은 기소중지됐다. 서울중앙지법은 2008년 민사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을 내리고 정 씨가 김 씨에게 원금 100억 원과 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3년 만에 부과된 세금 24억 원
아이러브스쿨을 떠난 김 씨는 모두와 연락을 끊고 집으로 들어갔다. '뭘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후회할 일을 안 하려면 아무것도 안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아이는 두 살과 네 살. 직장인 아내 대신 육아와 가사에 전념했다. 일은 없었지만 배짱은 두둑했다. 선 지급받은 20억 원 덕분이었다. 그 돈으로 10억 원대 아파트를 구입했고, 5억 원은 직원들에게 분배했으며 남은 5억 원으로 부모님과 자신의 차를 바꿨다. 그러고도 현금이 남아 있었다. "조만간 현금 80억 원이 더 들어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하지만 정 씨의 도주로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더 큰 문제는 3년 후 발생했다. 2004년 세금부과 예비통지서가 날아왔다. 김 씨가 정 씨에게 주식을 양도했기 때문에 양도소득세를 내야 한다는 것. 김 씨는 돈을 못 받았기 때문에 세금을 낼 수도 없고 낼 필요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자문한 변호사 역시 "세금은 실질과세원칙이 있기 때문에 대금을 못 받았으면 세금을 안 내도 될 것"이라 말했다. 하지만 국세청에서는 기존 세금 9억 원에 미신고가산세(50%), 연이율(25%) 등을 붙여 24억 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 국세청에 소명자료를 냈나요?
"네, 그런데 국세청에서는 '제가 받을 돈을 못 받았을 뿐이지 명의를 넘긴 건 확실하기 때문에 세금 관계에서 채권 채무관계는 유효하다'며 세금을 내라고 하더라고요."

↑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벤처 육성 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당시 정부 지원에 힘입어 2000년 전후로 '벤처 광풍'이 불었다.
▼ 왜 국세청에서 통지서가 날아오기 전까지 국세청과 의논하지 않고 기다렸나요?
"사실 정 씨가 도망친 이후에도 '어쩌면 돈을 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정 씨와 쓴 계약서에 '계약이 파기될 경우 주식을 돌려받는다'는 조항이 있어요. 주식을 돌려받으면 세금을 안 내도 되니까.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으니 그냥 기다린 거죠."
▼ 2001년 주식거래 직후 국세청에 자진신고를 했으면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당시만 해도 세금 9억 원을 낼 여력이 있었을 텐데요?
"네, 당시 세금을 내려면 낼 수 있었어요. 제가 사고 나서 집값이 폭락했지만 모든 재산을 긁어모으면 9억 원을 만들 수 있었죠. 근데 그럼 우리 가족은 당장 갈 곳이 없잖아요. 아비로서 그건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기다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죠."
2004년 국세청의 통보를 받고 그는 다시 변호사를 찾았다. 그때 변호사들은 "왜 세금을 안 냈느냐, 지금이라도 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이미 24억 원의 세금을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가 처음 생각한 방법은 위장이혼이었다.
"집, 차, 주식, 상가 등 당시 재산 모두 잃을 순 없잖아요. 일단 아내와 서류상 이혼을 하고 제 재산 모두를 아내에게 위자료로 줬어요. 원래 집은 아내 명의였고요. 근데 제가 어수룩했던 게 세금 부과 이후 위자료를 준 것에 대해 국세청에서 저를 사해행위로 고소했어요.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목적으로 위자료를 줬다'면서요. 결국 아내에게 넘긴 상가, 주식 등이 다 국세청에 압류됐는데 그게 총 4억5000만원 정도 됩니다."
그는 아내와 두 아이를 뉴질랜드로 보냈다. "1년 반만 있다 와라. 꼭 성공해서 빚 다 갚아놓겠다"고 단언했다. 2005년 '아이티아'라는 벤처회사를 세웠다. 아파트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한 공동구매 사이트였다. 그의 돈 3억 원과 투자 목적으로 끌어 모은 돈 2억5000만 원을 투자했다. 그는 "그래도 아이러브스쿨 창업자로 이름을 날렸는데, 내가 사업을 재개한다면 사람들이 쳐다는 봐줄 줄 알았다"고 말했다. 현실은 냉혹했다. 끝내 추가 투자는 받지 못했다.
"4년 만에 시장에 나오니까 투자가 안 되는 거예요. '누가 요즘 인터넷 투자합니까'하고 오히려 반문하더군요. 결국 사업은 실패하고 아이들과 아내는 돌아왔어요. 8개월 남짓 가족과 함께 살다 결국 집을 나왔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아내와 자식들, 다 같이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미 서류상 이혼한 상태니 별도의 절차도 없었습니다. 아이들과는 2년째 연락을 안 하고 있어요."
더는 살 이유가 없었다. 모든 걸 포기하려던 그에게, 한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그보다 네 살 연하의, 아이티아 동업자였다.
"그 사람, 처음에는 사업을 포기 안 했어요. 투자를 못 받는데도 '정말 좋은 아이디어니 나 혼자라도 해보겠다'며 뛰어다니더라고요. 나중엔 저를 포기 안 하더군요. 제가 인간답게 살 때까지 제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요. 자기도 사업 실패로 모든 걸 잃었으면서 '희망을 잃지 말라'고 끊임없이 저를 살렸어요. 만약 그때 그녀가 없었다면 전 정말 지금 이 세상에 없었을 겁니다."
2007년 두 사람은 살림을 합쳤다. 김 씨가 신용불량자이기 때문에 혼인신고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두 아이의 아비로서 역할을 못했다"는 죄책감에 아이도 낳지 않기로 했다. 이후 번역, 광고 중개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2008년 중국에서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지만 또다시 실패. 2011년 한국에 돌아온 김 씨가 평형기관 이상으로 쓰러졌을 때 아내는 김 씨 곁을 늘 지켰다.
요즘 김 씨는 아내와 휴대전화 한 대를 나눠 쓴다. 아내와 24시간 붙어 있기 때문에 전화를 따로 가질 필요가 없다. 김 씨는 인터뷰 바로 전 주에 아내와 3박4일 강원도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회는 비싸서 고민 끝에 3만 원짜리 문어 한 마리 사 먹고, 호텔도 아닌 민박집에서 묵었다. 아내 이야기를 하는 김 씨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2년 전 정 씨 돌아왔지만…
"저에게 사랑은 '신뢰'지만 아내에게 사랑은 '희생'입니다. 이혼남인 저를 만나 결혼식 제대로 못하고, 호강 못하고 살지만 늘 제 곁을 지켜줘요. 올해는 꼭 웨딩드레스 입고 웨딩촬영 하기로 약속했어요. 그 꿈이라도 꼭 멋지게 이뤄주고 싶어 요즘 열심히 운동 중입니다."
성공한 IT CEO에서 사업에 실패한 낭인으로. 그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건 금양의 사장이던 정 씨다. 정 씨는 2010년 11월 마침내 도주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귀국 직후 4박5일간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구속되지 않았다. 기자는 정 씨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김 씨 역시 정 씨의 현황을 몰랐다. "정 씨를 원망하는가?"라고 묻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전 제 실패가 단순히 정 씨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도화선이 된 건 맞지만, 당시 사회 환경이 그랬고 저도 무지했습니다. 박수를 한 손으로 칠 수 없듯 당시 모든 환경이 맞아떨어져서 그런 거죠. 정 씨 개인적으로도 저한테는 '인생을 망친 나쁜 놈'이지만 자기 가족에게는 좋은 아버지, 좋은 남편이겠죠. 그 사람 나름으로는 2001년 해외로 도주하고 2010년 감옥 안 가는 게 최선이었겠죠.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지켰으니 그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 아닙니까?"
김 씨는 "다만 2010년 정 씨 귀국 이후 사법처리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 씨가 귀국했지만 여전히 결론은 내려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담당 검사가 바뀌고 현재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담당 서성호 검사)에서 수사 중이지만 김 씨는 "1년 반 동안 검찰에서 '수사 중입니다. 사건이 오래돼 판단 내리기 쉽지 않습니다'라는 답변만 듣고 있다"며 답답해했다.
"정 씨가 부정하게 외국으로 도망쳤고 9년 만에 돌아왔습니다. 전 이미 2008년 민사소송에서 승소했고 그가 계약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 명백한데 현재까지 아무 결론이 없습니다. 저는 정 씨만 돌아오면 합의가 되거나 정 씨가 형사적으로 처벌을 받아 제게 부과된 세금이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는 최근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데 그중 하나가 검사장, 지검장 등 고위 사법관을 선출직으로 바꿔야 한다는 캠페인이다.
"현재 판·검사 인사권을 쥔 사람은 소수의 권력자입니다. 자기 목줄 잡고 있는 사람들이니 결국 권력자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죠. 그런 판·검사장을 국민이 뽑으면 국민을 위해 일하지 않겠습니까?"
"그릇에 물이 넘치니 그릇이 깨졌다"
아무리 벤처 광풍이었다지만 어떻게 아이러브스쿨은 출시 1년도 안 돼 회원 500만 명을 모을 수 있었을까? 김 씨는 냉정한 얼굴로 "아이러브스쿨은 뒷걸음치다 쥐 잡은 격"이라고 잘라 말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명확한 계획이 없었어요. 당시 박사과정 1년 차였는데 부모님은 제가 졸업하면 당연히 교수가 될 줄 아셨지만 현실은 쉽지 않잖아요. 그때 창업이 돌파구로 보였어요. 단순히 '인터넷에서 사람을 모으면 광고가 붙고, 그러면 돈이 되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뿐이었죠. 사업에 목표가 없었어요. 그냥 돈 많이 버는 게 목표였죠."
'얼떨결에' 만든 사이트가 대박을 치니 신이 났다. 수많은 언론에서 취재를 요청했다. 돈이 쏟아졌고 모두가 부러워했다. 김 씨는 "당시 언론에서 취재를 오면 마치 연예인이 된 것처럼 능숙하게 포즈 취하고 허세를 떨며 이야기했다"고 회상했다.
"2000년에 한 달 생활비가 2000만 원이 넘었어요. 1주일에 3번 이상 술 먹는데 무조건 룸살롱 가고, 무조건 현금으로 계산하고요. 2000년 1년 동안 술값으로 쓴 돈만 1억은 넘을 거예요. 옷도 늘 알마니 같은 명품 브랜드에서 맞춤 양복으로 입었죠. 당시 총선 때 '비례대표 주겠다'는 정당도 있었어요. 구름 위를 붕 떠다녔죠."
그는 가장 큰 실패 원인으로 "실패만 대비한 채 성공을 대비하지 못한 것"이라고 자탄했다.
"저는 늘 실패만 대비했어요. '여기서 실패하면 학교로 돌아가야지. 이 서비스 실패하면 다음엔 뭘 해야지.' 그런데 잘 되면 어떻게 할 건지는 생각을 못했어요. 막연히 '잘되면 좋은 거 아닌가' 하고 넘어갔죠. 그런데 그때 배웠어요. 컵에 물이 너무 많이 담기면 그냥 물이 넘칠 것 같은데, 사람의 경우는 컵이 깨져버리더라고요. 제 그릇이 담을 수 없는 압박이 오니까 저라는 인간이 그냥 깨져버렸어요. 다시 '인간 김영삼'을 정립하는 데만 3년 이상 걸린 것 같아요."
▼ 회원 수가 많으니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었던 거 아닌가요?
"아뇨, 그냥 아이러브스쿨의 인기를 좇아가기만도 바빴어요. 회원 수에 걸맞은 서버를 확충하려면 돈을 투자받아야하니까 돈 받으러 쫓아다니다 그냥 끝나버렸어요. 회원들은 점차 '아이러브스쿨 너무 느리다' '리뉴얼이 부족하다' 불평하면서 결국 싸이월드, 프리첼 같은 사이트로 옮겨갔어요. 불안했죠."
투자받은 돈이 있으니, 수익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도 거셌다.
"처음부터 비전이나 수익에 대한 고민 없이 막연하게 시작한 사업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회원 가입 때부터 구체적인 학교, 회사를 기입하게 해 '우리 회사에서 동문 찾기' 서비스를 유료로 제공했으면 엄청난 돈을 벌었을 텐데 초기에 그런 생각을 못했어요. 아쉽죠."
대기업 "50억에 넘겨라"
당시 IMF 외환위기 이후 침체돼 있던 경제에 벤처는 새로운 활력소였다. 수많은 '눈먼 돈'이 흘러들었고 선진화된 미국식 금융기법이 도입됐다. 김 씨는 당시 정부, 기업의 대처가 '지속 가능한 벤처'를 키우기에는 걸맞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그는 "2000년 초 아이러브스쿨이 점차 인기를 끌어가자 삼성, 효성, LG 등 대기업에서 '아이러브스쿨을 50억 원에 인수하겠다'고 제시했다"고 말했다.

↑ '아이러브스쿨'을 통해 동문 찾기 붐이 일었다.
"당시 야후코리아에서는 아이러브스쿨에 인수대금으로 300억 원, 후에는 500억 원을 제의했어요. 국내 기업들은 인터넷 사업에 투자할 때도 기존 대주주와 지분 싸움에서 이길 정도로만 지분을 확보해요. 회사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인수 뒤 어떻게 성장시킬 것인지에 대한 비전은 없죠."
"이들이 마음 놓고 거래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눈을 가려줬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애꿎은 창업자들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벤처 성장의 열매는 누리지 못했죠."
"이젠 인터넷 강국 아닌 소국"
야인(野人)으로 돌아간 김 씨는 요즘 인터넷 산업을 보면서 안타까움이 적지 않다. 김 씨가 아이러브스쿨 경영권을 내놓은 2001년부터 '벤처 거품론'이 일어났다. 넘쳐났던 벤처 투자가 싹 사라졌고 수많은 벤처가 도산했다. 최근 모바일 열풍을 타고 '벤처 르네상스'가 왔다고 하지만 그 투자 규모는 전성기 때의 절반도 안 된다. 김 씨는 "벤처 광풍은 사실이나 그 덕에 인터넷 산업이 큰 것을 부정할 수 있나? 급속한 성장 뒤에는 다 후유증이 있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만한 광풍 없이 어떻게 전국에 광통신망이 다 깔릴 정도로 인프라가 좋아졌겠습니까? 광풍이 불었다면 그 결과를 이용해서 인터넷 산업을 더 키워야 하는데 이후 정부는 인터넷 산업 키우는 데 충분한 투자를 안 했습니다. 2000년, 2001년만 해도 해외에 없는 우리만의 아이디어가 많았습니다. 아이러브스쿨과 싸이월드는 페이스북, 마이스페이스 등 SNS의 시초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로는 한국에서 세계 인터넷 산업을 이끌 수 있는 아이디어가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보다는 해외에서 성공한 모델을 가져와서 베끼는 수준이지 헤게모니를 바꿀 서비스는 못 만들고 있습니다. 투자가 안 되고 인재를 못 키우기 때문입니다. 불과 5년 전만 해도 '한국은 인터넷 강국'이라 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젠 누가 그런 말 합니까? 이젠 '인터넷 소국'이고 '후진국'입니다."
김 씨는 "인터넷 광풍의 수혜자인 NHN이 반성할 대목"이라며 말을 이었다.
"NHN이 2004년 중국에 진출하면서 '한국 인터넷 산업은 성장 단계에서 성숙 단계에 접어들었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시 NHN 매출은 3000억 원에 불과했습니다. 한 '산업'의 '리딩 컴퍼니'가 고작 매출이 3000억 원이면서 '성숙'을 논하는 게 말이 되나요? 1위 업체면 1위 업체답게 산업을 키우기 위해 책임감을 가져야죠. 최근 NHN과 다음, 네이트 등 인터넷 산업을 이끄는 회사들 행태를 보면 삼성, LG 등 기성 대기업과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서비스가 있으면 헐값에 인수하고, 독과점하고…."
"투자하면 무조건 회수해야 한다"는 식의 벤처 투자문화도 벤처 산업 부활에 찬물을 끼얹는 요소다. 김 씨는 "그건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고 잘라 말했다.
"페이스북의 경우 2005년 미국의 2개 학교, 영국의 2개 학교 총 4개 학교에서 서비스가 진행되던 당시에도 4000억 달러의 투자를 받았습니다. 가능성만 보고 투자하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수익성이 없으면 투자조차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 현실에서 한국형 마크 주커버그를 찾는 건 어불성설이죠."
김 씨는 "페이스북, 유튜브 등 현재 인터넷 헤게모니를 잡고 있는 서비스 대부분이 한국에서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었다"고 단언한다. 그가 가장 아쉬웠던 것은 아이폰이다. 한국이 최초의 모바일 인터넷 폰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
"2000년에 우리나라도 아이폰처럼 모바일을 이용한 '웹 휴대폰'을 만들 기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SK, LG, KT 등 통신사업자들이 통신사 간 경계를 풀어주지 않았어요. 만약 내가 A통신사 가입자면 무조건 모바일에서 A통신사 사이트를 통해 다른 사이트에 접속할 수 있게 한 거예요. 통신비용도 과도하게 부과하고요. 그래선 모바일 인터넷을 사용 안 하죠. 통신사 횡포고 독과점인데 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제재를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때 통신사 경계망이 풀렸으면 우리나라에서 아이폰을 먼저 만들었을 거예요. 그런데도 2007년 미국에서 아이폰, 아이패드가 출시되자 한국 오피니언 리더 사이에서 '애플 열풍'이 불었어요. 마치 페이스북 하고 아이패드 쓰는 게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특권인 것처럼요. '왜 우리나라에서는 먼저 아이패드를 못 만들었나?' 하며 울분을 토해야 할 사람들이 그냥 애플에 빠져 있는 거예요. 명나라 사대주의에 빠져 있던 조선의 관료들이 생각나더군요."
그럼에도 한국은 여전히 인터넷 시장에서 강점이 있다. 2011년 7월 기준 한국의 초고속 무선 인터넷 보급률은 89.8%.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가장 높다. 일본은 76.7%, 미국은 53.5%에 불과하다. 김 씨는 "향후 세계적으로 무선 인터넷 보급률은 더욱 높아질 것이고, 그때를 대비해서 어떤 서비스가 성공할 수 있을지 지금 우리나라에서 실험해보는 게 가장 좋다"며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국을 다시 인터넷 강국으로 만들어놔야 한다"고 말했다.
세 번의 인터넷 사업과 실패. 하지만 김 씨는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새로 구상하는 인터넷 사업에 대해 설명했다.
"구체적인 아이디어는 많아요. 그런데 아이러브스쿨 실패 이후, 뭐든지 논문을 쓸 정도로 공부하지 않으면 시작하지 않아요. 그리고 '결과보다는 과정이 중요하다'라는 흔한 말을, 이제는 정말 가슴으로 이해합니다. 2001년 이후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지만 한순간도 후회하지 않습니다. 남은 생도 후회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어요. 이제 20억 원의 미납 세금, 신용불량자라는 꼬리표 모든 게 다 제 인생의 일부라고 생각해요. 암 덩어리를 안고 꾸역꾸역 살아가다보면 언젠가 답이 나오겠죠."

Saturday, July 27, 2019

토쿄핫 품번




 
-편집: 불토리-  
품번발매일배우다른 이름
n00012003-09-15쿠라모토 마이(倉本舞)쿠라모토 마이(くらもとまい)
n00022003-09-15아오키 리카(木梨花)쿠도 사키(工藤紗希)
n00032003-09-15야마다 마리(山田まり) 
n00042003-09-15시라토리 유키(白鳥ゆき)시바사키 미토(柴崎未永)
n00052003-09-30쿠라모토 마이(倉本舞)쿠라모토 마이(くらもとまい)
n00062003-10-15아오키 리카(木梨花)쿠도 사키(工藤紗希)
n00072003-10-30요시카와 유키나(吉川雪菜) 
n00082003-11-15야마다 마리(山田まり) 
n00092003-11-30요시카와 유키나(吉川雪菜) 
n00102003-12-15야마구치 레이코(山口玲子) 
n00112003-12-30시라토리 유키(白鳥ゆき)시바사키 미토(柴崎未永)
n00122004-01-15야마구치 레이코(山口玲子) 
n00132004-01-30카노 레이미(叶麗美) 
n00142004-02-15후루카와 유마(古川由摩)후루카와 유마(古河由摩)
n00152004-02-29카노 레이미(叶麗美) 
n00162004-03-15후루카와 유마(古川由摩)후루카와 유마(古河由摩)
n00172004-03-30타키자와 미스즈(滝沢美鈴)아마이 미츠(天衣みつ)
n00182004-04-15사에키 히카루(木ひかる)혼조 히카루(本城ひかる)
n00192004-04-28노구치 카호(野口かほ)노구치 카호(野口佳)
n00202004-05-03나카지마 사나(中嶋佐奈)나카지마 사나(中島佐奈)
n00212004-05-15후지무라 아야카(藤村あやか) 
n00222004-05-29시부야 리나(谷りな) 
n00232004-06-05타키자와 미스즈(滝沢美鈴)아마이 미츠(天衣みつ)
n00242004-06-15아이자와 모모(相もも)아이자와 모모(相桃)
n00252004-06-25노구치 카호(野口かほ)노구치 카호(野口佳)
n00262004-07-05나카지마 사나(中嶋佐奈)나카지마 사나(中島佐奈)
n00272004-07-15시부야 리나(谷りな) 
n00282004-07-25후지무라 아야카(藤村あやか) 
n00292004-08-05코지마 에리카(小島エリカ)코지마 에리카(小島えりか)
n00302004-08-15아이자와 모모(相もも)아이자와 모모(相桃)
n00312004-08-25미야자키 리사(宮崎リサ) 
n00322004-09-05코지마 에리카(小島エリカ)코지마 에리카(小島えりか)
n00332004-09-15사쿠라다 사쿠라(田さくら) 
n00342004-09-25미야자키 리사(宮崎リサ) 
n00352004-10-05칸자키 레이(神崎麗) 
n00362004-10-15츠바키 마야(つばき摩耶)츠바키 마야(椿まや)
n00372004-10-25사쿠라자와 유키노(桜沢雪乃) 
n00382004-11-05사카이 미키(坂井美紀) 
n00392004-11-15코미야마 레이(小宮山怜)나가야마 치아이(永山千愛)
n00402004-11-25칸자키 레이(神崎麗) 
n00412004-12-05사쿠라자와 유키노(桜沢雪乃) 
n00422004-12-15쿠리야마 미쿠(栗山未)아다치 미쿠(阿立未)
n00432004-12-25코미야마 레이(小宮山怜)나가야마 치아이(永山千愛)
n00442005-01-01오키나 츠바사(沖那つばさ) 
n00452005-01-05오키나 츠바사(沖那つばさ) 
n00462005-01-15사쿠라이 아야카(井彩花) 
n00472005-01-25데비(デヴィ) 
n00482005-02-05츠바키 마야(つばき摩耶)츠바키 마야(椿まや)
n00492005-02-15카와이 유이(かわいゆい) 
n00502005-02-25세토 아야(瀬戸彩) 
n00512005-03-05아야나미 레이카(綾波レイカ)하마나카 아유(浜中あゆ)
n00522005-03-15마츠시마 야야(松嶋耶弥)마츠시마 야야(松島やや)
n00532005-03-25사쿠라다 사쿠라(田さくら) 
n00542005-04-05카네코 아야카(兼子あやか)사쿠라이 미즈키(井美月)
n00552005-04-15마츠무라 카스미(松村かすみ) 
n00562005-04-25사쿠라다 사쿠라(田さくら) 
n00572005-04-30<총집편> 
n00582005-05-03사카이 미키(坂井美紀) 
n00592005-05-05카즈키 카논(香月かのん)하즈키 시온(華月しおん)
n00602005-05-15콘도 마리코(近藤理子)오이시 모에(大石もえ)
n00612005-05-25사쿠라다 사쿠라(田さくら) 
n00622005-05-27오시마 카렌(大島華) 
n00632005-05-30<총집편> 
n00642005-06-05나카지마 세리나(中嶋里奈)나카지마 세리나(中島里奈)
n00652005-06-15아이자와 히토미(藍澤ひとみ) 
n00662005-06-25카네코 아야카(兼子あやか)사쿠라이 미즈키(井美月)
n00672005-06-30<총집편> 
n00682005-07-05키타지마 리카(喜多嶋梨香) 
n00692005-07-15마츠오카 리호(松岡りほ)요시나가 히토미(吉永瞳)
n00702005-07-25카네코 아야카(兼子あやか)사쿠라이 미즈키(井美月)
n00712005-07-30<총집편> 
n00722005-08-05코니시 리오나(小西りおな) 
n00732005-08-10아이다 카호(愛田かほ)사가라 히카루(相ひかる)
n00742005-08-15아이자와 쿠루미(愛くるみ) 
n00752005-08-25아소 메구(麻生めぐ)이와시타 이즈미(岩下いづみ)
n00762005-09-06호시카와 렌(星川れん) 
n00772005-09-13사츠키 마이(月舞) 
n00782005-09-20아베 카오리(安倍かおり) 
n00792005-09-27요시이 유이(吉井ゆい) 
n00802005-09-30이마이 아이코(今井愛子) 
n00812005-10-04카가쿠 리카(加額理香)이이지마 카에데(飯島楓)
n00822005-10-11미즈키 유(水月ゆう) 
n00832005-10-18아키모토 준나(秋元純菜)아키모토 준나(秋本純菜)
n00842005-10-25키타하라 미나미(北原みなみ) 
n00852005-10-31잇시키 안나(一色安奈) 
n00862005-11-01아오키 미유(木美優) 
n00872005-11-08아사히나 리카(朝比奈リカ) 
n00882005-11-15시마 아스카(志摩明日香) 
n00892005-11-22아소 메구(麻生めぐ)이와시타 이즈미(岩下いづみ)
n00902005-11-29스즈키 유리(鈴木悠里)스즈키 유리(鈴木ゆり)
n00912005-11-30카와나 치나미(川奈ちなみ)카와나 치나미(河奈ちなみ)
n00922005-12-06세리자와 마유라(芹まゆら)히메노 미쿠(乃未)
n00932005-12-13모리미야 미유키(森宮美雪)스기하라 이즈미(杉原いずみ)
n00942005-12-20후지사와 마리아(藤マリア)후지사와 마리아(藤まりあ)
n00952005-12-25하즈키 카린(葉月かりん) 
n00962005-12-28시라토리 카호(白鳥果) 
n00972005-12-31모로오카 유(諸岡ゆう) 
n00982006-01-01쿄노 아케미(京野あけみ) 
n00992006-01-03마나카 유리(中ゆり) 
n01002006-01-10이나바 미사키(葉みさき) 
n01012006-01-17사쿠라이 아야카(井愛華) 
n01022006-01-24히로타 미키(田美紀) 
n01032006-01-31아마노 마코토(天野琴) 
n01042006-02-07미도리카와 아카네(川茜)아오이 에미리(葵えみり)
n01052006-02-12모리나가 미메이(守永未明) 
n01062006-02-14시마 아스카(志摩明日香) 
n01072006-02-19타카미야 사오리(高宮沙織) 
n01082006-02-21키리야 시즈카(桐谷香) 
n01092006-02-28나츠이 세리나(夏井里奈) 
n01102006-03-05오쿠보 아이(大久保衣) 
n01112006-03-12코바야시 스즈카(小林涼香) 
n01122006-03-14카스가 미요(香菅みよ)오키 유이(おおきゆぃ)
n01132006-03-19츠바키 마야(つばき摩耶)츠바키 마야(椿まや)
n01142006-03-21카와이 코코나(河合ここな) 
n01152006-03-26키타가미 모모(北上もも)모리노 카오리(森野かおり)
n01162006-03-31샤카 유미코(迦由美子)히메노 안(乃あん)
n01172006-04-02마츠모토 마키(松本紀) 
n01182006-04-09카토 란(加藤爛)와카바 카오루코(若葉子)
n01192006-04-11미도리카와 아카네(川茜)아오이 에미리(葵えみり)
n01202006-04-16후지이 미사코(藤井美砂子) 
n01212006-04-18사와다 유카리(澤田由香里) 
n01222006-04-23이노우에 마야(井上マヤ)마야(まや)
n01232006-04-30아마미야 카오루(雨宮かおる)아마미야 유(あまみやゆう)
n01242006-05-02아이자와 유이(相唯衣)아이자와 유이(相澤唯衣)
n01252006-05-07카스가 미요(香菅みよ)오키 유이(おおきゆぃ)
n01262006-05-14사카시타 요코(坂下陽子) 
n01272006-05-16모리타카 레나(森高レナ)모리시타 미레나(森下ミレナ)
n01282006-05-21오미야 레미(大宮れみ) 
n01292006-05-28아가와 리오(阿川理央) 
n01302006-05-31미우라 유코(三浦裕子) 
n01312006-06-04요시카와 히나코(吉川ひなこ)리코(rico)
n01322006-06-06사카키 리오(りお)사카키 리오()
n01332006-06-11카와나 마이(川奈舞)아스카 이오(あすか伊央)
n01342006-06-18아라키 리코(荒木りこ) 
n01352006-06-20나카타니 미호(中谷美)미나모토 미이나(みなもとみいな)
n01362006-06-25키타가미 모모(北上もも)모리노 카오리(森野かおり)
n01372006-06-30미도리카와 아카네(川茜)아오이 에미리(葵えみり)
n01382006-07-02카와나 마이(川奈舞)아스카 이오(あすか伊央)
n01392006-07-09스기사키 아야(杉崎綾)아야노 미유키(綾野みゆき)
n01402006-07-11미카미 사키(三上沙紀)이케노 토모(池野朋)
n01412006-07-16하야카와 히카리(速川ひかり)하야미 히카루(速水ひかる)
n01422006-07-18토코나츠 미칸(常夏みかん) 
n01432006-07-23카와나 마이(川奈舞)아스카 이오(あすか伊央)
미나미 유(南ゆう)나가이 아이코(永井あいこ)
칸자키 아리사(神崎里沙)
아이자와 히토미(藍澤ひとみ) 
사카키 리오(りお)사카키 리오()
n01442006-07-30아키타 나오미(秋田奈美)후지사키 미유(藤美優)
n01452006-08-06카와나 마이(川奈舞)아스카 이오(あすか伊央)
n01462006-08-08에가와 세나(江川奈)세나 에미리(名えみり)
n01472006-08-13카와나 마이(川奈舞)아스카 이오(あすか伊央)
미나미 유(南ゆう)나가이 아이코(永井あいこ)
칸자키 아리사(神崎里沙)
아이자와 히토미(藍澤ひとみ) 
사카키 리오(りお)사카키 리오()
n01482006-08-15아라키 리코(荒木りこ) 
n01492006-08-20모리타 메구미(森田めぐみ) 
n01502006-08-27사와다 나츠미(澤田なつみ)스즈네 리오나(鈴音りおな)
히라야마 모에(平山もえ)
n01512006-08-31쿠도 유코(工藤裕子)코야마 아키(小山アキ)
n01522006-09-03카와나 마이(川奈舞)아스카 이오(あすか伊央)
미나미 유(南ゆう)나가이 아이코(永井あいこ)
칸자키 아리사(神崎里沙)
아이자와 히토미(藍澤ひとみ) 
사카키 리오(りお)사카키 리오()
n01532006-09-10이주인 미카(伊集院美香) 
n01542006-09-12와카바야시 리카(若林リカ)와카바야시 미호(若林美保)
코무로 유나(小室優奈)
n01552006-09-17오사와 모에(大萌)요시카와 모에(吉川萌) 
n01562006-09-19에가와 세나(江川奈)세나 에미리(名えみり)
n01572006-09-24나카타니 미호(中谷美)미나모토 미이나(みなもとみいな)
n01582006-09-30카와나 마이(川奈舞)아스카 이오(あすか伊央)
n01592006-10-01오타 미유(太田美優)타키모토 사야카(本紗耶香)
n01602006-10-08후쿠오카 미쿠(福岡未)우에하라 토모미(上原友美)
n01612006-10-15미즈키 에리나(水樹英理奈)마나베 미나(鍋美奈)
n01622006-10-17모리타 메구미(森田めぐみ) 
n01632006-10-22카스가 미요(香菅みよ)오키 유이(おおきゆぃ)
n01642006-10-29오사와 모에(大萌)요시카와 모에(吉川萌) 
n01652006-10-31오자와 유키(小雪) 
n01662006-11-05사와다 나츠미(澤田なつみ)스즈네 리오나(鈴音りおな)
히라야마 모에(平山もえ)
n01672006-11-07에비사와 마리(蛯沢真理)하야미 모코(速水もこ)
n01682006-11-12호리키타 미키(堀北美樹) 
n01692006-11-14카와나 마이(川奈舞)아스카 이오(あすか伊央)
n01702006-11-19타카하시 미키(高橋みき)오츠키 미나미(大槻みなみ)
n01712006-11-21나미키 사야(並木沙耶) 
n01722006-11-26아사다 마미(美)스즈키 사토미(鈴木さとみ)
n01732006-11-30히비노 마리(日比野理)닛타 히카루(新田ひかる)
n01742006-12-03미즈키 에리나(水樹英理奈)마나베 미나(鍋美奈)
n01752006-12-10후쿠오카 미쿠(福岡未)우에하라 토모미(上原友美)
n01762006-12-12나카니시 시호(中西志保)시오리(詩織)
n01772006-12-17테라다 미사(寺田美沙)쿠로사키 아미(崎あみ)
n01782006-12-19아시자와 카오리(芦香織) 
n01792006-12-24타나카 아이(田中愛)메쿠미(MECUMI)
n01802006-12-26히비노 마리(日比野理)닛타 히카루(新田ひかる)
n01812006-12-31오자와 유키(小雪) 
n01822007-01-01후지사와 안나(藤安奈)코사카 리나(香坂りな)
n01832007-01-05아사다 마미(美)스즈키 사토미(鈴木さとみ)
n01842007-01-09마츠바라 아카네(松原茜)미즈키 린(美月りん)
n01852007-01-12시마자키 카오리(島崎かおり)시마다 카나(島田香奈)
n01862007-01-16세리자와 하루나(芹春菜)세리자와 하루나(芹はるな)
n01872007-01-19타카하시 미키(高橋みき)오츠키 미나미(大槻みなみ)
n01882007-01-23타나카 아이(田中愛)메쿠미(MECUMI)
n01892007-01-26후지사와 안나(藤安奈)코사카 리나(香坂りな)
n01902007-02-02카나자와 히토미(金瞳)아오이 모모카(あまいももか)
n01912007-02-06오노 유미(小野悠美)하세가와 나아미(長谷川なぁみ)
n01922007-02-09아사다 마미(美)스즈키 사토미(鈴木さとみ)
n01932007-02-13시노자키 유키에(篠崎雪枝)사이토 메구미(藤めぐみ)
n01942007-02-16후지키 료코(藤木涼子)센바 치즈루(千羽千鶴)
n01952007-02-20나카노 야요이(中野弥生)카제타니 히카루(風谷ひかる)
n01962007-02-23이시구로 케이(石圭)쿠로다 유카(田有香)
n01972007-02-27오츠카 레이코(大塚玲子)오쿠보 레이(大久保怜)
n01982007-03-02사와타리 안리(渡杏里)와타세 안나(渡安奈)
n01992007-03-06후지사와 안나(藤安奈)코사카 리나(香坂りな)
n02002007-03-09아사오 미치(尾美知)엔도 하루카(遠藤はるか)
(다음에 계속...)








------------

TMI...



아마이 미츠가 출연한 n0017와 n0023이 명작. 감도 좋다는 게 바로 이런 것.





노모계의 마담뚜 '사쿠라다 사쿠라'도 이때가 전성기(n0033, 53, 56, 61).





나카지마 사나도 RQ 코스로 절정을 찍었지만, 이후에 업계 최악의 흑역사 Bakky 사건으로 은퇴.. 지못ㅠ





n0047에 출연했던 데비는 이후에 MIYA로 개명하고 싱어송라이터로 현재까지 활동중





사와다 나츠미는 중간에 사라졌다가, 몇 년 뒤에 얼굴 싹 다 튜닝하고 '스즈네 리오나'라는 이름으로 다시 나타났다. 
나츠미 시절에 찍은 n0150, 166 보다는, 리오나 시절에 찍은 n0718가 스타일리쉬하고 괜찮다.





n0154에 출연한 와카바야시 미호는 SM 스트립 쇼의 거물. 이쪽 세계에선 상당히 알아주는 누님이다.





스즈키 사토미의 풋풋했던 데뷔 초창기 모습. 아직 젖살이 안 빠졌다. (n0172,183,192,600,602)





와타세 안나는 주로 로리 컨셉으로 나오던 배우인데, n0198, 217에선 확 나이 들어보여서 갭이 컸던 걸로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