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5, 2021

노인 50억 사기

 혼자 사는 '땅 부자' 찾아온 남성들.....자신도 모르는 '배우자' 김 씨


20년 넘게 컨테이너에 사는 노인이 있다. 서울 양재동과 성내동에 50억 원대 땅을 보유한 67살 한 모 씨, 친지도 연락되는 사람도 없이 혼자 주차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물려받은 자산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는 이른바 땅 부호였다. 주변인들은 그가 사업을 정리하고 1992~3년쯤 이곳에 머무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2015년 1월 말쯤, 국가 정보기관 요원이라는 남자 서너 명이 한 씨가 살고 있는 컨테이너를 찾아왔다. "안기부 직원인데..." 한 씨는 이유를 모르지만, 안기부를 두려워했다. 전기충격기를 갖고 온 사내들에게 한 씨는 제압당했다.

남성들이 한 씨를 덮치기 보름 전쯤, 한 씨는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됐다. 결혼 상대는 한 씨와 일면식도 없는 61살 김 모 씨. 김 씨가 한 씨의 인감도장을 몰래 파고, 증인 2명을 대동해 서류상 혼인신고를 낸 것이다.

허위 혼인신고를 낸 사람도 60대 어르신.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이대면서 인적사항과 증인 2명의 전화번호도 실제로 기재하면서 혼인신고를 내니 공무원도 깜빡 넘어갔다. 그렇게 불현듯 한 씨에게는 배우자라는 법률대리인이 생겼다.

'배우자'로 둔갑한 김 씨조차 한 씨를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상태였다. 김 씨는 주범 45살 정 씨가 "일이 잘 끝나면 빌라 한 채를 주겠다"는 말에 넘어갔다. 김 씨는 정 씨 부동산 투자회사의 정직원은 아니지만, 심부름을 해주며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김 모(61) 씨는 ‘빌라 한 채’를 받기 위해 한 씨와 일면식도 없이 허위 혼인신고를 했다.김 모(61) 씨는 ‘빌라 한 채’를 받기 위해 한 씨와 일면식도 없이 허위 혼인신고를 했다.

"50억대 땅 부자가 혼자 산다는데...."

부동산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주범 정 씨는, 한 씨의 소식을 자신의 회사 직원에게 전해 듣게 된다. 회사 직원 박 모(59) 씨 등 3명은 한 씨 근처 오피스텔에 사는 박 모(57) 씨에게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다.

내용인즉슨 "50억 원대 땅을 가진 홀몸 노인이 있는데, 정신이 온전치 않다. 가족도 없고 연고도 없는 사람이라 그가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쓸 사람이 없다. 안기부 직원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또 "경계심이 많아 아무하고도 친하지 않은데, 오피스텔 건물주라고 자신을 소개했더니 이런저런 말을 해줬다"고도 했다.

이 말만 듣고 어떻게 '작전'을 짰을까. 박 씨에게 말을 들은 직원들이 사장 정 씨에게 보고했다. 전해 들은 정 씨조차 반신반의했지만, 걸린 돈이 50억 원이니 솔깃해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2년이 지나 경찰에 덜미를 잡혀 진술할 때도 "설마 진짜 그 말처럼 될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피해자 한 씨는 현재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땅이 팔리거나 자신이 ‘결혼’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피해자 한 씨는 현재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땅이 팔리거나 자신이 ‘결혼’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알고보니 땅주인은 조현병 환자

한 씨 땅이 넘어가는 것은 일사천리였다. 2015년 1월 '정보기관 요원'들은 국가 비밀 사업이라며 한 씨의 정신을 홀딱 빼놓았다. 조현병을 앓던 한 씨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로 땅문서에 도장을 찍어 일당에게 넘겼다.

정 씨 등 6명은 2015년 2월 35억 원 상당의 양재동 토지를, 같은 해 4월 15억 원 상당의 성내동 토지를 제3자에게 모두 팔아넘겼다. 세금 등을 모두 제하고 손에 쥔 돈은 30억 원가량. 적당히 서로에게 나눴다.

생각보다 싱겁게,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돈을 가로채는 데 성공하자 뒷감당이 어려웠다. 일단 한 씨가 지내는 땅이 다 넘어갔으니 당장 한 씨를 컨테이너에서 꺼내와야 했다. 마침 팔아넘기기 전인 모텔이 하나 있었다. 적당한 말로 둘러대며 한 씨 손을 묶어 차에 태워 충북의 한 모텔로 데려갔다. 감금의 시작이다.

사진 출처=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사진 출처=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7개월의 감금생활 그리고 정신병원 강제입원

충북 등지의 모텔 2곳과 빌라 1곳에 한 씨를 7개월가량 데리고 다니며 사실상 감금을 시켰다. 2015년 4월 무렵부터 12월이 될 때까지 한 씨를 방에 가두고, 바깥에서 잠금장치로 한 씨가 나오지 못하게 막아놨다.

이동할 때, 그리고 한 씨가 머무를 장소 등에서 감시책 역할을 할 공범이 2명 늘어났다. 이렇게 일당은 8명이 됐다. 새로 끌어들인 이들에게 운전도 시키고 입막음도 하면서 한 씨 감금에 동원했다. 식사 등은 서류상 배우자인 김 씨가 담당했다.

쉽게 가로챈 돈이라 그럴까. 투자회사 사장 정 씨는 다른 곳에 투자하다가 돈을 모두 잃고, 나머지 공범들은 강원도 모처에서 도박 등 유흥비로 짧은 시일 안에 돈을 탕진했다. 30억 원이 금세 증발한 것이다.

돈이 없어지니 갈등이 생겼다. 일단 '빌라 한 채를 받기로' 했던 가짜 배우자 김 씨는 더 이상 한 씨에게 식사 등 수발을 드는 데 질렸다. 약속했던 빌라도 받지 못한 상황. 내분이 생겼다. 또 몇 사람씩 당번을 정해 감시를 하면서, 공범들도 더는 못 하겠다면서, 주범 정 씨에게 돈을 계속 요구했다. 정 씨도 투자 명목으로 돈을 지출하고 남은 돈이 없는 상황. 이들의 결속력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정신병원 입원 기록과 허위혼인신고 서류 등이 놓여 있다.정신병원 입원 기록과 허위혼인신고 서류 등이 놓여 있다.

법적 보호자된 '배우자'

정 씨 등은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보이는데, 서류상 배우자인 김 씨를 법적 보호자로 내세워 한 씨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전북의 한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 씨를 입원시켰다.

전문의 판단은 조현병. 세간에는 조현병이 정신분열증이나 폭력성을 띠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현병의 증세는 여러 분야에 걸쳐져 있다. 우울함이나 아무 관련 없는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심, 또는 정신지체 등. 한 씨 증세도 이런 종류 가운데 하나였고 정신병적으로도, 그리고 '법적 보호자'의 동의 여부도 입원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2015년 12월, 한 씨는 그렇게 정신병원에 입원한 채로 쓸쓸히 지냈다. 문제라면 문제랄까. 정신보건법상 환자는 한 병원에 6개월을 초과해서 머무를 수 없게 돼 있다. 보호자가 다시 와서 입원기간을 연장하든지, 다른 병원을 옮기든지 하는 조치가 필요했다. 한 씨는 2016년 4월 15일에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2016년 10월에 다시 처음 입원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6개월이 지난 2017년 4월 무렵. 한 씨가 병원을 옮겨야 하는 시점이 돼 법적 보호자 김 씨가 병원에 등장하던 날,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경찰관들이 들이닥쳤다.

사건의 주동자 정 씨가 대전의 모처에서 검거됐다.사건의 주동자 정 씨가 대전의 모처에서 검거됐다.

'서울→충청→전북', 2년의 공백...8명 어떻게 잡았나?

2015년 4월 한 씨는 원래 살던 서울을 떠나 충청 지역을 돌며 7개월간 감금 생활을 하고, 직후 1년 4개월가량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한 씨와 연락이 닿았던 사람은 전혀 없는 상황. 경찰은 어떻게 이들을 잡았을까.

2017년 3월 무렵. 첩보를 입수했다. "정신은 온전치 않았지만, 땅에 대한 집착 하나는 대단했던 홀몸노인이 있는데, 영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 노인이 보이지 않는 데다, 친지도 없는데 그가 살고 있던 곳에 공사가 진행되더니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입주했다"는 말이 경찰의 귀에 들어왔다.

24년 정도를 혼자 컨테이너에서 살던 60대가 행방이 묘연하고, 그 자리에 택지가 개발됐다는 얘기. 수사에 착수했다.

실마리는 한 씨와 허위 혼인신고를 했던 김 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러 방식으로 수사한 끝에, 한 씨의 병원 연장 일자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김 씨가 병원을 갔던 2017년 4월 어느 날, 김 씨 앞에 등장했다.

법적 보호자 신분이기도 했던 김 씨는 한 씨 정신병원 입원도 계속해서 '챙겨야' 하는 입장으로서 불만도 많았다고 한다. 그를 통해 주범 등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곧바로 주동자 정 씨 등을 찾아내 붙잡았다. 지난 2년간 공범들로부터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던 그는, 이미 사건의 전말을 알고 등장한 경찰에게 진술하면서 혐의와 관련한 내용을 부인하지 않았다.

경찰은 일당 8명을 4월과 5월에 걸쳐 모두 검거하고, 4명을 구속, 4명을 불구속 입건해 조사를 마쳐 검찰에 송치했다. 그중 주범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은 사실 6명이었다. 운전기사나 단순 감시책을 맡았던 2명을 사건의 종범으로 보고 불구속 입건했다. 주범 6명 중 2명은 이미 다른 사건에 엮여 구속돼 검찰에 넘어가 이번 사건으로 따로 구속할 필요가 없었다.

땅주인 한씨는 빈털털이....여전히 정신병원에

정신질환이 있는 홀몸노인의 전 재산 50억 원을 가로채고 납치, 감금해 7개월을 끌고 다니고서 정신병원에 1년 넘게 강제로 입원시킨 일당이 모두 붙잡혀 검찰에 넘어갔다. 형사 사건으로서 경찰이 할 일은 마친 셈이다. 그들의 혐의는 검찰이, 그리고 이후 재판과정에서 죄명으로 바뀌고 벌 받을 것이 있다면 받을 것이다.

한 씨는, 여전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갈 곳도, 한 씨를 보호할 인물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일단 경찰 측은 즉시 한 씨의 법적 보호자를 가짜 배우자이자 사건의 공범인 김 씨에서 한 씨 거주지를 담당하던 지방자치단체의 장(구청장)으로 바꿨다. 그러나 모든 재산을 잃은 한 씨는, 보호자도, 집도, 생활비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정 씨 등이 가로채 간 돈은 이미 수년 전 여러 사람을 거쳐 거래가 완료된 상황. '모르고 한 거래', 즉 선의의 거래라면 환수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고는 있지만 이미 택지 개발도 완료되고, 입주자도 들어선 상황에서 환수하기에는 현실적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또 도박이나 유흥비로 이미 탕진한 지도 시일이 지난 상황이라 범죄 수익금을 환수하기 어렵게 됐다.

경찰 관계자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정신질환이나 노령으로 법률적인 행위 능력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홀몸노인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 재산을 노린 범행 또한 증가추세라며, 비단 한 씨만의 일이 아닐 수 있음을 우려했다. 또한 성년 제도나 법률 행위 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더욱 촘촘해질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경찰은 경제적 기반을 모두 잃은 한 씨의 치료 및 생계비 지원 방안 등을 마련하면서, 앞으로 한 씨에 대해 민사상 후견 제도, 피해회복 등을 위한 법률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관계기관과 지속적으로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CS 101

 

Part 2. 운영체제

Part 3. 시스템 프로그래밍

Part 4. 컴퓨터 구조

피닉스 관장

 이런 류의 글을 올리는 지체가 매우 부끄럽지만 어쩔 수 없이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살다보면 참으로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갈 수 없을 때가 있지요. 난 어려서부터 몸을 다치기 전까지 무엇하나 부러울 것이 없던 사람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내 몸의 치료를 위해 27회의 대수술 비용을 위해 난 내가 가진 모든 물적 재산과 심지어 부모님의 가산마저 모두 탕진하고 말았지요. 오로지 내 한 몸을 살리기 위해서...

모진 고통과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그런 투병생활을 거친 후에 난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 할 수가 있었고 건강 할 때의 권투가 아닌 몸이 상한 후에 지도자로서의 권투를 새로이 접하게 되었지요.

5년여 동안 무보수로 아이들을 지도하고 아이들이 내주는 각종
대회에서의 성적만을 먹고 살 때 그래도 자부심은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난 내 체육관을 해보고싶은 욕심에 여러분들의 도움과
가진 돈 모두 털어 충남 장항이란 곳에 사설 복싱 체육관을 열었지요.

허나 운명은 날 가만두질 않더군요.
또한 체육관 건물이 그 지역 건달 오야붕의 건물이기에 나 또한
같은 부류로 취급되어 일반인은 고사하고 모두가 사고뭉치 친구들만
날 찾아오더군요. 난 쓰레기통에서도 장미꽃이 필수 있다는 그런
신념으로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지도했으나...
경제적으로 늘 허덕이며 살았죠.

그러던 중 작년 이맘때쯤 서울의 문성길 체육관의 조영섭 관장님이
내게 이곳 21세기의 조회장님을 인사시켜 주었습니다.

체육관의 사범으로 일정액의 월급과 함께 관비는 모두 제가 갖는
조건으로...조건은 참 좋았습니다.

허나 문제는 21세기 체육관을 운영한지 7년 동안 관원 한 명 인계 받지
못하고 그야말로 폐쇄직전의 체육관이라 말 그대로 모든 장사가 그렇듯
손님 한 명 없는 죽은 사업체를 인수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허나 난 여건이 허락한다면 어떤 악조건에서도 이겨낼 자신이
있었기에 묵묵히 최선을 다해서 식구들을 지도했고 입에서 입으로
조금씩 알려지면서 관원 식구들이 또 다른 식구들을 데려오는 그런
가정 같은 체육관이 되어갔습니다.

늘 하던 대로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만 난 늘 그대로이고
내 앞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철이나 기운이 준용이 ..........
모두들 떠나갔지만 아직도 내 곁엔 나와함께 체육관에서 식사를
함께하고 훈련을 사사 받는 웅정이와 명이가 있습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체육관을 조금씩 살리던 중 조회장이란 분이
내게 체육관을 완전인수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사업이 여의치 않아서 월급을 못 준다며 체육관을
팔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난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거금을 만들수있는 길이 내겐
어두운 세계와의 접촉뿐이었기에 난 많은 갈등을 하며 괴로워했지요.

다행히 난 1년 안에 3천 만원을 주는 조건으로 조회장님과 체육관
인수계약을 했고 12월이 중도날짜인줄 알았는데 11월 1일날이 바로
내가 중도금을 지불하는 날이더군요.

조회장님을 만나뵙고 며칠의 말미를 얻어서 시간은 벌어 놓았으나
지금 내겐 천 만원이란 거금이 필요한데 당장 어디 가서 차용 할 수 있는
그런 힘도 없고 참으로 난감하여 홀로 불면의 밤을 세우고 뒤척이다보니
그렇더군요...

생각이 많아 잠을 자지 못하니 피곤해서 밥맛도 없고 무기력해지고
그러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권투조차도 귀찮아 지더군요.

술로 하루하루 버티다가 이러면 안되지 싶어 마음을 다잡아먹고
식구들을 지도하니 한결 마음은 편해졌으나 아직 해결치 못한
돈 때문에 참으로 가슴이 아프더군요.

육체적인 고통은 얼마든지 버틸 수가 있으나 마음이 아프니 도저히
초인적인 힘을 낼 수가 없더군요.

그러던 중 어제 제 생일을 맞이했습니다.
난 내 생일 날짜조차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늘 옆에서 챙겨주는
엄지가 있기에 많은 가족들의 인사를 받으며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난 체육관을 운영하면서 돈을 잘 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웅정이나
명이가 엄지나 나를 호칭할 때 관장님 사모님이란 말보다 엄마, 그리고
아버지라고 호칭할 정도를 날 믿어주고 따라주는 마음을 알기에...
식구들이 한결같이 날 좋아 해주기에 난 행복했습니다.

요즘은 경기가 다들 어렵더군요...젊은 친구들은 잘 모르겠지만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몸과 피부를 통해서 잘 알지요.

여러분 마지막으로 부끄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여러분들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난 권투를 해야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날 믿고 따르는
식구들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만원이든 천원이든 제게 도움을 주실 분들은 아래 은행계좌로
후원 부탁드립니다.

권투를 그리고 21세기를 포기하기엔 난 너무도 해야할 일이 많습니다.
11월 13일까지 여러분들의 자그마한 정성을 기다리며 이만 줄입니다.

chef

 넉넉한 환경이 아니다보니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하철역 앞에서 찹쌀떡 떼어다 팔고 신문 배달하며 용돈을 벌었죠.”

7성급 호텔로 불리는 두바이 호텔 ‘버즈 알 아랍’ 출신 셰프이자 복합문화공간 ‘사운즈한남’의 총괄셰프를 지낸 박민혁(40) 셰프의 어린시절은 그의 커리어와는 달리 윤택하지 않았다. 동네 밥집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암 투병을 시작하며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고 고 3때 아버지가 돌아 가시면서부터는 할머니를 모셔야 하는 소년가장이 됐다.

고달픈 일들이 많았을 것 같은 서사지만 그는 성공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셰프로서 성공이라 할 만한 커리어들을 쌓았다. 이제는 좀 편히 지낼만도 하지만 그는 지금도 쉬지 않고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 중이다. 

그는 서울 성산동에서 와인바를 운영하고, 요리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구독자들에게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고 있으며 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친다. 다양한 분야의 셰프들이 팝업 스토어 형태로 식음료를 제공하며 고객 반응을 테스트하는 요리연구소 설립도 준비 중이다. 컨설팅도 한다. 몸이 열 두개라도 모자라보이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는 그를 그가 운영하는 서울 성산동의 와인바 킥에서 만났다.


-소믈리에도 아닌데 일반 레스토랑이 아닌 와인바를 열었습니다.

“와인을 엄청 좋아한다. 처음부터 좋아하진 않았는데 와인을 정말 좋아하는 멘토와 함께 2~3년 정도 마시다보니 자연스럽게 빠졌다. 사실 셰프들이 와인은 잘 모른다. (웃음) 좋아하는 와인을 공부도 할겸 와인바를 열었다.”

-주택이 밀집한 성산동에 와인바를 연 것이 특이하다. 강남이나 한남동에 보통 많지 않나.

“안 그래도 여기에 와인바를 열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많이 말렸다. 상권도 없고, 와인이 잘 팔릴 것 같지 않은 분위기라고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해보고 싶었다. 상권도 없고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브랜드를 만들어 낸다면 더 의미가 있지 않겠나. 처음 3개월 정도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첫날부터 만석이었다. 1주일에 보통 하루 빼고는 전부 만석이다. 와인은 3만원대를 많이 준비했는데 막상 가장 잘 나가는 와인은 8만~15만원대다. 이런 걸 보면 상권이 레스토랑의 위치를 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셰프의 커리어에 비춰볼 때 음식 값이 비싸지 않은 것 같은데.

“강남, 한남에 있는 와인바에 갔을 때 아쉬웠던 점들이 있었다. 안주 대부분이 프로슈토 같은 햄 종류나 견과류, 치즈 등으로 한정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좀 더 다양하게 제공하고 싶었다. 메뉴는 다채롭게 가져가되 양을 줄여 한 번에 여러가지를 맛 볼 수 있도록 했다. 음식 값은 부담스럽지 않게 1만원 이하부터 비싸도 2만원 중반을 넘지 않도록 책정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요리로 성공했다. 처음 요리는 어떻게 시작한 건가.

“고등학교 때부터 피자헛에서 주방,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4년 정도 같은 일을 계속하다 보니 지루하더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생겼다. 오토바이라는 취미 이외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어릴적 아버지의 주방에서 일을 도왔던 것이 떠올랐고 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요리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까지 모셔야 하는 형편에 대학 등록금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무료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한남직업전문학교였다. 수강생의 연령대가 다양해 60대와 한 공간에서 요리를 배웠다. 다들 목표가 뚜렷해 경쟁이 치열했지만 매 수업마다 최선을 다했고 그를 눈여겨 본 당시 메리어트 호텔의 조리장이었던 전주대 김지응 교수의 눈에 띈 그는 ‘한그린’이라는 레스토랑에 소개를 받아 취업했다. 초창기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던 한그린은 하루 매출만 1000만원이 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한그린에 들어가면서부터 양식 요리로 진로를 결정한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한그린에서 양식의 매력에 푹 빠졌다. 조우현 조리명장(조리명장은 국내 12명 뿐이다)이 계신 곳이다보니까 배울 점이 참 많았다. 엄청 바쁜 곳이었는데 주방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후배에게 폭언을 하는 다른 업장들과는 달랐다. 모두 행복하게 요리했고 퇴근 후에도 자발적으로 남아 요리대회를 준비했을 정도로 열정이 가득했다. 요리를 대하는 태도, 일하는 방식 등을 많이 배웠다.”

-막내였으면 설거지만 했을텐데 요리를 배울 시간이 있었나.

“당시 막내들은 하루종일 설거지만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즘 체계가 갖춰진 레스토랑들은 셰프들이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설거지만 해주는 스튜어링이라는 직책을 따로 두기도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설거지만 하면 요리를 배우기 어려우니 한 두시간씩 일찍 출근해서 연습했다. 중간중간 선배들을 돕거나 선배들이 잠시 쉴 때 궁금했던 걸 물어보면서 요리를 배웠다.”

-일을 하면서 대학에도 다녔다고 한다.

“그때는 주 6일에 밤까지 일할 때라 대학에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근데 조우현 명장님께서 야간대학을 권유해주시면서 내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해주셨다. 주 3일 정도는 학교에 가기 위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대신 쉬는 날 없이 매일 업장에 나가서 일했다. 너무 재미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6성급 호텔인 W 서울 워커힐(현 비스타 워커힐 서울)이 문을 열 때 자리를 옮겼는데.

“야간 전문대를 다니고 있을 때 W호텔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다. 주위에서 한 번 이력서를 내보라고 해서 냈다. 전문학사 이상의 자격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재학 중에 내서 떨어졌었고, 졸업 후 합격했다. 면접을 보러 갈 때 넥타이를 못 매서 그냥 노타이로 갔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타이를 매지 않아 오히려 좋게 봤다고 하더라. W호텔은 일반 호텔과는 달리 매니저가 머리를 푸르고 다녔고 회사에서도 귀고리, 코걸이를 선물로 줄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그랬던 것 같다. W호텔에선 영어 이름을 쓰면서 모두 수평적으로 소통했다. 동서양이 믹스된 음식들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년 정도 일하다 두바이로 갔다.

“W호텔 업장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가 두바이 버즈 알 아랍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당시 에드워드 권 셰프가 총괄셰프로 그 선배를 데려 갔었다. 나도 가고 싶었다. 영어는 잘못했지만 무작정 지원했고 면접에 대비해 영어 답변을 달달 외웠다. 3개월 후 전화로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합격해 두바이로 갔다.”

-호텔 출근을 위해 떠난 두바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실종된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공항에 도착하니 호텔 직원이 픽업을 나와있었다. 숙소로 데려다주면서 하룻밤 자고 호텔 인사팀을 찾아가면 된다고 했다. 영어를 잘 못해서 그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다음 날 호텔 방에서 마냥 기다렸는데 아무도 픽업을 안 오더라. 그래서 시내에 나가서 구경을 하고 밤에 돌아오는 생활을 며칠 반복했다. 나흘쯤 뒤에야 아침에 누가 내 방을 두드리더라. 내가 호텔에도 오지 않고 방에도 없어 실종된 줄 알았단다. 우리나라였으면 진짜 크게 혼났을 것 같은데 다같이 웃고 넘어갔다.”

-왜 먼저 호텔에 가볼 생각은 안 했나.

“다른 호텔은 그냥 들어갈 수 있다. 근데 버즈 알 아랍은 다리를 건너야 호텔에 들어갈 수 있다. 예약을 안 하거나 정직원 사원증이 없으면 그 다리를 건널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봤었다. 그래서 인사팀에서 나를 데리러 오는 걸 기다리고만 있었다.” (웃음)

-버즈 알 아랍 호텔 주방에서 일한 이야기를 소개해달라. 인종 차별은 없었는지도 궁금하다.

“입장할 때 5만~7만원 정도를 내고 들어가는 호텔이라 레스토랑도 굉장했다. 혼자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30만원은 쓰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2교대로 근무를 했는데 난 교대 시간에도 퇴근하지 않고 하루종일 일했다. 일하는게 너무 행복했다. 생각해봐라. 외국에 나가야만 볼 수 있었던 캐비어, 푸아그라, 트러플 등 진귀한 재료들이 냉장고마다 그득그득했으니 얼마나 좋았겠나. 이런 재료들을 참치, 스팸, 계란처럼 쓸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레스토랑은 골프공 만한 트러플 2~3개를 주문해서 굉장히 아껴쓴다. 근데 거기선 트러플 프로모션을 한다고 3억원어치를 시켜서 쓰는 거다. 정말 행복했다.

내가 있던 주방에선 30명 정도가 함께 일했다. 그중 같은 국적이 한 명도 없었다. 가뜩이나 영어를 못했는데 국적이 다양해 억양들이 다 다르다보니 의사소통하는데 더 애를 먹었다. 한 달동안 업장의 모든 소리를 녹음해서 숙소에서 반복해 들었더니 귀가 트이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편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늘더라. 인종차별은 없었다. 출근 첫날부터 축구를 같이 했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박 셰프는 버즈 알 아랍에서 2년 정도 일했다. 한국에서 레스토랑을 열기 위해 귀국한 에드워드 권 셰프의 제안으로 버즈 알 아랍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시안 퓨전부터 유러피안 레스토랑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레스토랑을 경험한 시기였다. 에드워드 권과는 10년 정도 함께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호텔, 일반 레스토랑 둘 모두를 경험했다. 경험자로서 두 유형 가운데 추천하는 일터가 있다면.

“예전에는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호텔에 들어가야 했고, 또 들어가고 싶어하는 코스이기도 했다. 양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총주방장이 대부분 외국인이었고 그 사람이 레시피를 알려주다보니 더욱 호텔로 가고 싶어했다. 복지도 좋고, 체계도 더 갖춰져 있으니 일하는 사람으로선 더 좋았던 게 사실이다. 

근데 지금에 와서는 외국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온 셰프들, 호텔을 경험한 셰프들이 10년, 20년이 지나 자신만의 특색있는 레스토랑들을 많이 차렸다. 그러다 보니 요리를 위해 굳이 호텔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자기 색을 추구하면서 요리를 배우려면 호텔보다는 레스토랑을 추천한다. 호텔은 요리를 배우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좋은 레스토랑을 갖춘 호텔은 사실 얼마 안 된다. 현실적으로 업장의 직원들 복지를 챙겨주려면 근무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럼 홈메이드로 만들던 걸 냉동제품으로 바꿔야 한다. 나 때는 호텔에서 냉동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됐지만 요즘에는 많이 쓴다. 개인적으로는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배우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박 셰프는 에드워드 권 셰프와 함께 일할 당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주 6일, 하루 15시간씩 근무하던 때였지만 쉬는 날 하루를 이용해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십여년 간에 걸친 다양한 레스토랑 운영 경험에 경영 지식까지 갖췄던 그는 당시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던 복합문화공간 사운즈한남의 총괄셰프 자리를 제안 받았다.

-총괄셰프는 무엇을 하는 자리였나.

“당시 사운즈한남에는 와인바, 브런치 카페, 유러피안 레스토랑 등 5개 업장이 들어갔고 각 업장마다 주방장과 매니저 등이 있었다. 이들을 콘트롤 하는 것이 총괄셰프의 역할이었다. 메뉴 개편 때 셰프들이 만든 음식을 함께 맛보고 보완점을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메뉴를 직접 만들어 넣기도 했다. 레스토랑에 직접 가서 일을 돕기도 했다.”

총괄셰프로 3년 가량 근무하던 그는 유튜브로 눈을 돌렸다. 지난해 겨울 ‘공격수 셰프’ 채널을 만들었다. 그는 양식부터 한식까지 다양한 요리를 만드는 콘텐츠 뿐만 아니라 셰프들을 초청해 레스토랑의 뒷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한다. 라이브 방송으로도 구독자들을 만난다.  구독자도 꾸준히 늘어 2021년 9월 현재 12만명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앞으로의 목표, 계획이 있다면.

“코로나로 집콕 생활이 늘면서 주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나의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춘 주방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요리를 많이 해본 셰프가 만들면 더 효율적으로 공간을 구성할 수 있지 않겠나. 많은 집들이 제가 만든 브랜드의 주방 공간을 넣을 수 있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