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une 19, 2022

무역왕

 부자. 누구나 꿈 꾸지만 아무나 될 수 없는 말이다. 흔히들 말한다. 부자가 되려면 운이 따라야 한다고. 하지만 그뿐인가.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면이 분명히 있다. 전설처럼 회자되는 조선시대 부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타고난 운에다 명석한 판단력과 배짱, 그리고 담력을 활용해 맨주먹으로 꿈같은 부를 일군 것이다.

#무역으로 천만금을 벌다

조선시대 부자하면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인물이 있다. 베스트셀러 최인호의 소설 〈상도〉의 주인공인 임상옥이 그다. 1779년 태어난 임상옥이 부자가 된 계기가 있다. 임상옥의 나이 28세 때 서울의 군권과 치안을 맡고 있는 총융사 벼슬을 하고 있던 박종경이 친상을 당했다. 박종경의 아버지 박준원은 판돈령부사였다. 어영대장, 금아대장에 형조판서를 역임했던 순조 임금의 외할아버지다. 임상옥은 그의 집으로 5천냥을 들고 달려가 문상을 했다. 그리고 1백냥을 풀어 그집 종들에게 몇푼씩 쥐어주기도 하고 술도 사주었다. 그리고는 박종경이 자신을 부르기를 기다렸다. 과연 상을 마친 박종경은 며칠 후 임상옥을 찾았다. ‘도대체 누가 이 많은 돈을 부조한 것인가’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박종경이 물었다. “남대문으로 사람이 몇이나 출입하는 지 알겠느냐.” 임상옥은 “두 명입니다”라고 답했다. 아무리 사람이 많아도 이(득)도 해도 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이니 박종경에게 관심 있는 사람은 이, 해 두명뿐이라는 기발한 대답이었다. 임상옥의 사람됨을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던 박종경은 무릎을 탁 쳤다. 박종경은 대번에 임상옥이라는 인물이 큰 그릇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에게 인삼교역권을 맡겼다. 임상옥은 이를 바탕으로 가격이 맞지 않으면 인삼을 태워버리는 담력을 발휘해 중국에까지 이름을 날리는 큰 부자가 되었다.

#고아에서 1천만원대 현금 갑부로

조선의 최대 무역왕이자 현금왕으로 군림했던 인물. 1890년대 함경도 성진항에 나타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최봉준이다. 함경북도 경흥 출신인 그는 12세 때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됐다. 당시 그는 겨울의 쌀쌀한 날씨를 맞으며 가난한 품팔이들을 따라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로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보리쌀 두되와 엽전 20냥이 전부였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그는 러시아 설원에서 길을 잃고 이리떼에 쫓겨 죽음을 맞게 됐다. 그를 구한 사람은 러시아인 야린스키. 극적으로 죽음을 면한 그는 야린스키의 집에서 7년간을 일을 하며 러시아말을 배우고 러시아국적까지 얻었다. 야린스키가 죽자 그의 재산을 물려받는다. 그중 하나가 예전에 야린스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투자했던 주식이 올라 상당히 돈이 되었던 것. 이돈으로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 조선의 소를 러시아로 보내는 무역으로 큰 돈을 벌어들인다. 성진과 원산항을 중심으로 조선의 생우무역권을 쥐고 흔들었다. 그는 사람보다 소 보험을 먼저 들 정도로 자신의 재산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농사꾼에서 무역왕으로

함북 부령 출신인 김기덕이란 인물이 있다. 일본인 밑에서 일하다 일본으로 간 김기덕은 간장 도매점에서 상술을 배운다. 23세 때인 1915년 귀국해 러시아 무역에 손을 댄다. 연해주에서 청어를 팔아 돈을 벌면서 일약 청년무역가로 떠오른다. 하지만 루블화 장사, 말하자면 지금의 환전에 손을 댔다 몽땅 재산을 날린다. 그의 인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괘종시계 하나로 재기에 성공하는 것이다. 수중에 남아 있던 1만원을 몽땅 들여 순금으로 괘종시계를 만들어 당시 총독부 국장에게 바치고 조선은행에서 50만원을 융자 받는다. 이 돈으로 만주, 조선, 연해주를 연결하는 국경무역회사를 차린다. 그리고 회령에다 백산상점을 차려 목재업과 물화 수집업을 했다. 무산에다 목재회사를 차렸고 청진에다 수남제재소를 설립했다. 당시 개발바람을 타고 철도가 가설되고 있는 상황이어서 침목을 납품하고 전주(電柱) 공사도 시작했다. 그러면서 5년만에 완전 재기했다.

그는 나진 앞바다에 있는 돌섬 두개를 사들였다. 아무 쓸모없는 땅이었다. 사람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그는 ‘나진은 곧 항구가 된다’고 예견했다. 그리고 그 시기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이 들었을 때 섬을 산 것이다. 이처럼 배짱 투기가 가능했던 것은 정확한 상황판단이 한몫했다. 1920년대 대공황으로 일본은 대륙정책으로 돌파구를 뚫으려고 했고 그렇게 하려면 새로운 항구가 필요했다. 그 항구가 나진이었던 것이다. 지리적 조건으로 나진이 최고라는 생각을 한 김기덕의 배짱이 딱 들어맞았다. 나진항이 건설되면서 이 섬은 200배라는 엄청난 이문을 남겼다.

이외에 임치종과 홍순언 등은 중국에서 기생으로 전락한 명문가의 여성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 보은으로 부자가 됐다. 최창학은 망치 하나로 구성광산에서 노다지를 캐 후세 사람들에게 두고두고 선망의 대상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