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September 15, 2014

소라넷 섹스

드디어 시험이 끝났네요 ...ㅠㅠ

오늘까지 보강에 시험이 잡혀 있어서 집도 못가고 기숙사에 쳐박혀서 공부만 했는데

시험은 망하고 ㅠ_ㅠ.. 비와서 집도 못가고 ㅠㅠ...

룸메 언니 집 올라간지 한참 되서 또 혼자 방에서 뒹구는데 뜬금없이 오빠가 올라온다고 연락 왔더라구요

이 비오는데 올라오는건 뻔하겠죠..ㅎㅎ

아니나 다를까 만나자마자 말도 없이 지난번에 간 모텔로 대려가더라구요 

대실이 만오천원 밖에 안하는 곳이라 쿨하게 제가 내주고 방에 들어갔는데..

방에 들어가자마자 야수로 돌변하더니 어이구 @@......

힐도 다 안벗었는데 다짜고짜 벽에 밀치더니 키스하면서 옷 사이로 손 집어 넣는데..

그런 거친 행동에 자극 받았는지 저도 금방 숨소리가...ㅎㅎ

오빠가 많이 흥분 했는지 옷도 안벗긴 채 치마만 올리더니 뒤에서 바로 하는데..

뒷머리를 손으로 잡아 채면서 마치 강간 하듯이 발정난것처럼 하더라구요

제가 옷이라도 벗고 하자고 하니깐 입고 나온 옷이 청순하고 이뻐서 이렇거라면서

청순한걸레씨ㅋㅋ이러는데 아... 여기에 글 올린거 보고 이러는구나...ㅠㅠ...

할 말이 없더라구요 @@...결국 첫 번째 사정 할 때까지 실컷 당해주고..ㅎㅎ

사정할 때 입으로 받았는데 어찌나 사정하는지 입이 가득할 정도...한달동안 자위도 안했나ㅋㅋ

저도 시험 공부 하면서 받은 스트레스 풀 생각에 느끼는 대로 반응하면서 황홀하게 했던거 같네요

대실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원래 처음에 하기 전에는 여기에 사진 올릴 생각에 지난번처럼 사진 찍을까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네요 ㅎ

입으로 하는것만 영상으로 찍었는데.. 영상 캡쳐라 화질이 그닥인데.. 용량 줄인다고 줄여서 더 그닥되서....ㅠㅠ 그냥 봐주세요 볼건 없지만..ㅠ

아! 저번에 치마길이 올렸는데 그게 오른쪽 앨범란 베스트에 갔더라구요 

벗은 사진도 아니고.. 감사드려요! 쪽지는 최대한 답장하고 있는데.. 만남 같은건 좀......ㅠㅠ...



그리고 저번에 질문 했던 것 중에 그얘들한테 굴복? 당한게 모때문이냐는 질문 많았는데..

당하기 시작한지 3달정도 지난 후에 그랬던거에요

처음에 당할 때 특히 내나이 또래 애들이랑 할 때.. 반항도 많이 하고 그랬거든요

입으로 하거나 그러는거 잘 안하고 ..특히 내가 올라타서 허리 흔드는거 절대 안했죠

굴욕적이라 생각했거든요 내나이 또래 얘들은 더욱 그렇구요..

그리고 하면서도 맨날 분한 표정에 눈에 힘주고 그랬는데.. 진심이기 보단 이렇게라도 안하면 개내들이 너무 쉽게 볼거 같아서 그랬던거 같아요 의도된거죠 

근데 개내들은 오히려 그런걸 되게 즐겼어요 도도하게 행동하고 그래도 막상 시작하면 표정부터가 오르가즘 참고 있는게 너무 티나니깐.. 괴롭히는게 재밌다는 식이었죠

전에도 글에 썼는데 제가 굉장히 민감한 편이라.. 

까칠하게 굴고 도도하게 굴면서 눈에 힘주던 얘가 남자가 넣고 흔들기 시작하면 느끼고 ..

또 그걸 참는다고 분한 표정에 낑낑 거리는게 볼만 했겠죠..그런 행동 보면서 수치스럽게 대하고 조롱하고 그래도 계속 했던건 아까 말한 이유처럼 너무 쉽게 보일까봐..의도적으로 그랬던건데

하루는 나 처음 협박한 그놈 오피스텔에 모여서 가볍게 술먹는데 제가 옆에 있었거든요

근데 개내들이 억지로 술을 먹였고 .. 종이컵으로 한 3잔 먹었나? 30분 정도 지나니깐 거의 훅 가버려서 몸도 못가눌 정도..

술 좀 먹고나서 내 또래 애들이 방에 대리고 가서 그짓을 했는데..

취해서 감정 조절이 안되니깐.. 올라탄 자세로 허리 흔들었죠 수치스러운거 알면서도..

그 남자얘 가슴쪽에 머리 쳐박고 수치스러운거 참아가면서 흔들었는데..

사정한지도 모르고 흔드니깐 바닥에 내팽겨치고..그런 날 또 뒤에서 잡아서 하고..

다시 3번째 놈도 올라타서 흔들라해서... 흔들다가 결국 절정갔죠

절정가니깐 그제서야 상황 파악이되고 수치스럽고 감정 복받쳐서 결국 울었는데..

그때 아마 개내들 앞에서 처음 울었던거 같아요

그리고 나서는.. 대들지도 못하고 내나이 때 얘들한테도 저도 모르게 존댓말쓰게되고..

고개도 못들었죠.. 원래 겁많고 순종적인 성격이 그대로 들어난거고.. 이제 의도적으로라도 대드는건 생각도 못하겟더라구요.. 그리고 개내들은 그때 찍은 영상 보여주면서 조롱하는데..

영상보니깐..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침도 떨어지구.. 그런 꼴 아니깐 더 수치스럽죠..

그 이후에는 순종적으로 했고.. 정말 못하겠는건 못하겠다고 부탁하는 식이었지 대들지는 못했죠... 그래서인지 그때부터는 하는게 좀 심해지고 그랬어요

2000천 압박 있어서 여기서 줄여야 할거 같네요 댓글 편하게 달아주세요 

수치적인 욕플 보고싶네요 오늘 기숙사에 혼자라서^^..

소라넷 남자친구

나 지금 만나고 있는데....
이 사람이 점점 좋아져 어떡해??
사귀면 정상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난 대학생인데 어릴 때부터 남자랑 막 그런 관계하고 그런건 아니였어
내가 뭐 담배피고 술 먹고 그런 학생이 아니였고 그냥 공부하고 친구들이랑 수다 떠는 
평범한 학생이였어 
학생 때 사귄 남자가 10명 정도 되는 데 다 키스 밖에 안했었고
고2때부터 작년 이맘때쯤까지 사귄 남자친구랑 관계하고 그랬는 데
그전에 사겼던 애들은 다 내가 대쉬 받아서 사귄건데 얘만 내가 대쉬했던거거든
너무 좋아했었어 그래서 사귄지 1년 됐을 때 서로 관계했고
많이 좋아했고 많이 좋더라.


난 뭐 자위도 안했었는 데 전남친이랑 하다보니깐 몸이 깨어진다고 하나?
성욕에 눈이 떠서 자위도 하고 내가 먼저 하자고 했던 적도 많은 데
남자친구가 군대 가면서 헤어졌어.


그리고 남자 만나는 것보단 그냥 혼자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래서 일년정도 지났는 데
솔직히 자위만으로는 내 욕구가 충족되지 않더라고
그래서 판 하다가 전에 소라넷 어쩌구 하는 글을 봤는 데
소라넷이 뭐지 하고 들어가봤는 데;;;;;;
완전 장난아니더라. 막 야외에서 노출하고 쓰리썸?? 그런것도 하고....


그런건 하고 싶지 않았는 데 거기 뭐 남자 소개 같은 거 하는 게시판에서 구경하는 데
몸 좋은 사람도 많고 ㄱ..그거 좋은 사람도 많더라고
거기 막 18cm 정도 된다는 남자들도 있는 데 내 전남친이 12cm인가 그랬어 
자기가 고등학교 때 재봤다고 하더라


근데 난 막 그런걸로 보면서 흥분은 되도 설레진 않더라고
내가 그냥 섹스에 미쳐서 남자한테 나 하고싶으니깐 하자 그러는 것보다는 그냥 연애하는 사이에
하듯이 설레면서 만나는 게 좋은 데 다 거기 보면 막 창녀 취급한다고 하고 
암캐만 연락하라고 하는 애들도 많고 간혹 부드럽게 하는 거 좋아한다는 사람도 있는 데
매너 좋고 다정한 거 좋아한다는 남자가 있더라고.


ㄱ..그것도 크고 자기가 잘생겼대 운동도 몇년해서 몸 좋다고하고 
바로 자는 것도 싫고 자기는 카페 가서 커피 마시고 하는 거 좋아한다고
대화해보고 맘에 들면 관계했으면 한다고 그러는거야.
그래서 다른 남자들이랑은 좀 다르구나 싶어서 그냥 호기심에 연락했는 데
나는 그런데는 무슨 아저씨들이 고등학생한테 돈 주고 원조교제 같은 거 하는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어 솔직히 무섭잖아 쓰리썸이니 야외노출이라니.....
상상도 못하는 일들만 하고 있고 


연락하는 데 나랑 나이차도 얼마 안나고 나한테 뭐 할 때 이런거 저런거 좋아하는거 있냐고
좋아하는 거 위주로 해줄거고 싫어하거나 그런거 있으면 말하라고
그래서 말했더니 자기도 그런거 좋아한다고
여자친구랑 하듯이 남자친구랑 하듯이 설레게 하는 게 좋다는 데
좀 다정하긴 하더라 말하는 데 그러다가 통화하고 나서 얼굴 사진 교환했는 데
엄청 의외인건 관계 안 밝히게 생겼는데;;;;;


난 이런것도 처음이고 이렇게 노골적인 만남도 처음이다. 
임신 걱정도 무섭고 성병도 무섭고 혹시라도 그쪽이 내 동영상을 찍거나
내 신상을 까버리면 나는 인생 못 살거 같다 그게 두렵다 하니깐
내가 나랑 하자는 여자 신상 까발려서 뭐하냐 어차피 성욕은 자연스러운건데
그리고 여자는 남자 아무나 잡고 잘 수 있지만 남자는 쉽지 않다고
이렇게 연락주는 여자도 그리 많지 않은 데 내가 그런 멍청한 짓을 왜 하겠냐면서


피임은 자기가 할거고 성병은 얼마전에 회사에서 건강검진 한 게 있는 데
성병 여부도 나와있다고 그거 또 사진 찍어서 보내주더라 ㅋㅋ
그 사람이 만나보재 그냥 커피 한잔 하는게 뭐 어렵냐면서 그러는 데
솔직히 느낌도 괜찮고 커피 한잔만 먹는 게 뭐 대순가 싶어서 강남역에서 만났어


저번주 주말에. 잘생기긴 잘생겼더라 
생각보다 무섭지도 않고 그냥 만나자마자 그 사람이 내 손 잡아주는 데
내가 남자 손 오랜만에 잡아본다고 하니깐
귀엽다면서 머리 쓰다듬어주는 데 이상하게 설레는거야 


카페 들어가서 이야기 좀 하는 데 성적인 얘기보다는 먼저 일상적인 이야기 물어보더라고
평소에 뭐 하면서 지내냐 요즘 영화는 뭐 봤냐 남자친구랑은 헤어진지 얼마나 됐냐
이야기 하다보니깐 전공도 비슷하더라
그러다가 이제 물어봤어 내가 솔직히 남자친구랑 헤어진지 좀 됐고 
막 그거에 하는 거에 미쳐서 그러는 것보다는 그냥 편하게 만나면서
지냈으면 좋겠다니깐 자기도 그런게 좋다고 말하는거야.


내가 궁금해서 물어봤어
난 처음 들어간건데 호기심에 연락해봤다
근데 오빠는 이걸 왜 하며 얼마나 했냐고 물어보니깐
전에 만나던 여자한테 너무 데여서 여자친구 만들기가 너무 무섭다고
사람인지라 성욕은 있는 데 돈 주고 하기는 그렇고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
꼬셔서 사귀지도 않는 애매한 사이임에도 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그냥 파트너로 지낼 여자 만나고 싶어서 한다고 
어차피 그런 사람들끼리 모이는 곳이 여기 아니냐면서 


아무튼 이런저런 이야기 2시간정도 하다가 그날은 그냥 헤어졌어
만남 이후로 연락도 잦아지더라 물론 나도 많이 하긴 했고 
그러다가 어제 만나서 영화 봤어 영화보고 술 마시고 오빠랑 같이 있고 싶다고 했지 내가


가서 하는 데 전남친이랑 나는 서로 첫경험이라서 경험도 없고 어떻게 해야되는 지도 몰라서
엄청 엉성했었는 데 이 오빠는 엄청 능숙하더라.
진짜 키스하면서 손도 가만히 있지 않고 막 허리춤에 대고 허벅지 막 쓸고 
내가 그래서 왜 이렇게 잘하냐고 물어봤더니
자기가 스킬 연구하고 그런거지 화투판에서 딴거 아니라고 농담식으로 이야기 하는데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좀....그렇더라 스킬이;;;;
도대체 몇번이나 해봤냐니깐 자기도 200번까지는 세봤는 데 그 이후로는 안세봤다고
대충 계산해보면 500~600번 넘을 거 같다고 하더라;;;;;;;;;;;;;;;;;;;;;;;;;;;;;;;;;;;;;


그날 세번정도 했어 처음에는 좋긴 좋았는 데 엄청 오래가거나 그런건 아니였는 데
두세번째는 정말 오래가더라
내 남친은 금방 끝났었거든


그렇게 오늘 아침에 헤어지고 집에 와서 좀 자다가 일어났는 데
그 오빠한테 카톡 와있는 거 보니깐 또 보고 싶은 거 있지
말도 잘 통하고 나도 솔직히 이쁘다는 소리 듣는 편인데
그 오빤 이쁘장하게 생겨서 화장하면 나보다 더 이쁠 거 같아 ㅋㅋ


처음에 사진 보고 얼굴 봤을 때도 그냥 잘생겼다 정도였는 데
만나보고 성격이 끌리고 매력적인 사람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는 데
이제 얼굴도 더 잘생겨보이고 자꾸 이뻐보여
연애하는 기분이야 막 설레 
그때 당시에는 몰랐는 데 하고 나서 막 안기고 싶은데 알아서 안아주고
키스해주는 데 너무 달콤했던 거 같아
아픈 덴 없었냐고 물어봐주는 것도 너무 다정하고
운동해서 그런가 몸도 엄청 섹시하고 하는 것도 엄청 잘하니깐
진짜 내가 상상하던 스킬 이상이였어.....


생각보다 엄청 착해 뭐 가식인지는 사람이 대충 이야기해보면 알 수 있잖아
순진하진 않은데 순수해 전에 만나던 여자친구들 이야기 하면서 들어보면
상처도 많이 받은 거 같고 하는 짓도 애교도 많고 애기 같이 생겨서 
막 귀엽고 안아주고 싶고 그래 지금 이거 쓰면서도


생긴것도 잘생겨서 좋고 성격도 정말 맘에 들고 몸도 좋고 테크닉도 진짜 좋은 데
거기서 만났다는 게 너무 걸려.
지금 뭐 이 사람이랑 사귀고 싶다 그런건 아닌데 정말 정 들어서 사귈 수도 있는거잖아.
근데 만약 사귀게 되면 이 오빠는 거기다가 물건 사진도 올렸고 
거기서 많은 여자들도 만나봤대 쓰리썸도 해봤다고 하고;;;;;;;;


지금은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좋아지는 과정이라서 약간 무덤덤하거든?
근데 만약 사귀게 되면 그 과거에 내가 연연할 거 같아.
그냥 정말 쿨하게 성욕이 뭐 대수야 지금 나랑만 하면 돼 이런 생각을 먹어야할까
또 이렇게 생각하면 이 사람이랑 정말 잘해볼 수 있을 거 같은 데
막상 그게 또 안돼 어떻게 해야되지 


우선 만나기는 할거야 크리스마스 때 데이트 하기로 했는 데
그냥 우리는 관계만 하는 사이로 유지를 할거냐 아니면 
내가 다른 과거들 무시하고 진지하게 만나볼거냐 하는거야.


거기서 만난 거 아니면 정말 이런 걱정 안했을텐데...
왜 하필 거기서 만나서....... 모르겠다 

Friday, September 12, 2014

외국인노동자

경기도 남양주경찰서는 23일 상습적으로 초등학생을 성폭행한 혐의(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로방글라데시인 A(35) 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경찰에 따르면 A 씨는 16일 오후 7시께 공장 기숙사에서 B(13.초교 6년) 양을성폭행하는 등 8월부터 최근까지 공장 기숙사와 인근 화장실 등에서 50여차례 성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불법체류자인 A 씨는 학교를 마치고 공장 앞을 지나는 B 양에게 1천-2천원씩 주면서 친해진 뒤 기숙사 등으로 유인해 성폭행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은 또 다른 피해자가 있을 것으로 보고 A 씨를 상대로 여죄를 추궁하고 있다.

열등한 짐승의 국가인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스리랑카등의 족속들은 모조리 출입 금지시켜야한다.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짐승들이다. 

Wednesday, September 10, 2014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蟲).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의 대표작을 들어보자. <우주소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원제목: 정글대제), <사파이어 공주>(원제목: 리본의 기사)! 잊고 지내던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난 것 같지 않은가? 일본에서는 ‘만화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데즈카의 어린시절
데즈카는 1928년 11월 3일 오사카 근처의 신흥관광도시 다카라즈카에서 태어났다. 유복하고 개방적인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언제나 만화와 함께였다. 만화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책꽂이에는 만화 단행본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가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5학년 때는 노트1권을 가득 채운 장편만화를 창작하기도 하면서 작가적 기질을 보였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거금을 들여 2백 권이나 되는 만화책을 구입해주는 등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데즈카는 어머니와 함께 자주 다카라즈카 가극을 보러갔다.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다카라즈카 가극은 그에게 최고의 공연예술이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리본의 기사>는 그의 ‘가극중독’이 완치되지 않았을 때 만들어졌다. <리본의 기사> 의 주인공인 사파이어 공주는 왕위계승을 위해 가짜 남자로 살면서 한편으로는 이웃나라 왕자를 사랑하는 금발머리 처녀가 되고 싶어한다. 사파이어가 이처럼 심리적으로 양성성을 지닌 것은 다카라즈카 가극에서 여배우가 남자 역할도 하던 것에 대한 인상이 남아서라고 한다. 또한 데즈카는 자신의 작품 속 등장인물을 연극 단원처럼 여겨서 다양한 역으로 많은 작품에 등장시키는데 그는 이를 ‘스타시스템’이라고 불렀다.
외과의사와 만화가의 길 그 사이에서
그의 프로필을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학력: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 전문부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아톰을 그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겹쳐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가 이런 경력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태평양전쟁 당시, 오사카의 명문 중학교에 다니던 데즈카는 시력이 나빠 사관학교 대신 강제수련소로 보내졌다. 그는 ‘지옥 같다’고 회상했던 이곳에서 양팔에 심한 발진이 생겼고 한참동안 병원에 다녀야 했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이때. 데즈카는 1945년에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부 전문과정*에 입학한다.
이후 데즈카는 의사와 만화가라는 두 갈래의 길을 오가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다음 해인 1946년, 소국민 신문*에 <마짱의 일기장>이라는 네 컷짜리 카툰을 연재하여 만화가로 데뷔한 것이다. 이어서 1947년 발행한 <신보물섬>은 무려 40만 부가 팔린다.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쉽게 의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1953년에 국가시험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 개업하거나 진료행위를 한 적은 없다. 결국에는 만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만화는 희망이었다.
 데즈카는 1950년 <정글대제>(밀림의 왕자 레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52년에 <우주소년 아톰>, 이듬해에는 순정만화 <리본의 기사>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유명 만화가의 자리를 굳혔다. 데즈카의 이 초창기 3대 작품의 주인공들은 숙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천재 과학자가 죽은 아들을 대신해 만든 아톰은 자라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커스단에 팔린다. 레오는 엄마 사자가 사냥꾼에게 붙잡혀 런던으로 팔려가던 도중 태어나 바다로 뛰어내려야 했고 사파이어는 천사의 실수로 남녀의 양성을 모두 가진 채 태어났다. 이들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모습은 패전 후 무기력했던 일본 어린이들의 희망이 되었다.
 961년 데즈카 오사무는 6명의 스태프와 함께 <무시프로덕션>을 창립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강세였고 상대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위축된 상태였다. 데즈카는 디즈니의 제작방식을 따르지 않고 일본에서는 최초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1963년, 드디어 일본 최초의 TV애니메이션 <철완아톰>이 탄생한다. 이어서 1965년에는 일본 최초의 컬러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정글대제>가 방영되었고 그는 세계적인 만화가가 되었다.
데즈카 오사무는 노동착취자?
 <철완아톰>의 제작비 절감을 위해 무시 프로덕션의 만화가들은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데스카 오사무는 당시 TV극영화 제작비가 4~50만 엔이었기 때문에 스폰서가 없을 것을 우려해서 편당 55만 엔이라는 가격을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이었고 많은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이 그를 비판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는 추모사에 조차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덕분에 이후의 아니메 제작비가 언제나 바닥에 머무는 폐해가 생겼습니다. 애니메이션에 관해서 여태까지 데즈카 씨가 말해온 것이라든지 주장한 것은 전부 엉터리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추모사 중-
 
‘만화의 신’ 그의 만화에 대한 열정
그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열정이 담긴 만화들을 사랑했다. 평생 15만 쪽이 넘는 작품을 그린 데즈카 오사무. 그는 마지막 미완성 작품인 <불새>를 그리면서도 병상에서 "일을 달라.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외쳤다. 1989년 그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열정이 담긴 만화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영원히 ‘만화의 신’으로 기억될 것이다.
신성은 기자<ttd0426@hotmail.com>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부 전문과정: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 군의관을 보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중학 졸업생을 받아 이 과정을 이수하면 전문학교 졸업자격을 주었다. 일종의 군의관, 위생병 양성과정.
*소국민 신문: 현재의 마이니치 소학생 신문
*디즈니 식의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이 1초에 24장의 그림을 사용해(실사 영화와 동일) 촬영하는 것에 반해 1초에 24장 미만의 그림으로 24장의 효과를 내는 저 예산 애니메이션 기법.
*미야자키 하야오: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대표작 <미래소년 코난>(1978),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빨간 돼지>(1992), <원령공주>(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등

Sunday, September 7, 2014

Hermit



The hermit set out of camp at midnight, carrying his backpack and his bag of break-in tools, and threaded through the forest, rock to root to rock, every step memorized. Not a boot print left behind. It was cold and nearly moonless, a fine night for a raid, so he hiked about an hour to the Pine Tree summer camp, a few dozen cabins spread along the shoreline of North Pond in central Maine. With an expert twist of a screwdriver, he popped open a door of the dining hall and slipped inside, scanning the pantry shelves with his penlight.
Candy! Always good. Ten rolls of Smarties, stuffed in a pocket. Then, into his backpack, a bag of marshmallows, two tubs of ground coffee, some Humpty Dumpty potato chips. Burgers and bacon were in the locked freezer. On a previous raid at Pine Tree, he'd stolen a key to the walk-in, and now he used it to open the stainless-steel door. The key was attached to a plastic four-leaf-clover key chain, with one of the leaves partially broken off. A three-and-a-half-leaf clover.
He could've used a little more luck. Newly installed in the Pine Tree kitchen, hidden behind the ice machine, was a military-grade motion detector. The device remained silent in the kitchen but sounded an alarm in the home of Sergeant Terry Hughes, a game warden who'd become obsessed with catching the thief. Hughes lived a mile away. He raced to the camp in his pickup truck and sprinted to the rear of the dining hall. He peeked in a window.
And there he was. Probably. The person stealing food appeared entirely too clean, his face freshly shaved. He wore eyeglasses and a wool ski hat. Was this really the North Pond Hermit, a man who'd tormented the surrounding community for years—decades—yet the police still hadn't learned his name?
Hughes used his cell phone, quietly, and asked the Maine State Police to alert trooper Diane Perkins-Vance, who had also been hunting the hermit. Before Perkins-Vance could get there, the burglar, his backpack full, started toward the exit. If the man stepped into the forest, Hughes understood, he might never be found again.
The burglar eased out of the dining hall, and Hughes used his left hand to blind the man with his flashlight; with his right he aimed his .357 square on his nose. "Get on the ground!" he bellowed.
The thief complied, no resistance, and lay facedown, candy spilling out of his pockets. It was one thirty in the morning on April 4, 2013. Perkins-Vance soon arrived, and the burglar was placed, handcuffed, in a plastic chair. The officers asked his name. He refused to answer. His skin was strangely pale; his glasses, with chunky plastic frames, were extremely outdated. But he wore a nice Columbia jacket, new Lands' End blue jeans, and sturdy boots. The officers searched him, and no identification was located.
Hughes left the suspect alone with Perkins-Vance. She removed his handcuffs and gave him a bottle of water. And he started to speak. A little. When Perkins-Vance asked why he didn't want to answer any questions, he said he was ashamed. He spoke haltingly, uncertainly; the connection between his mind and his mouth seemed to have atrophied from disuse. But over the next couple of hours, he gradually opened up.
His name, he revealed, was Christopher Thomas Knight. Born on December 7, 1965. He said he had no address, no vehicle, did not file a tax return, and did not receive mail. He said he lived in the woods.
"For how long?" wondered Perkins-Vance.
Illustration by Tim O'Brien
Knight thought for a bit, then asked when the Chernobyl nuclear-plant disaster occurred. He had long ago lost the habit of marking time in months or years; this was just a news event he happened to remember. The nuclear meltdown took place in 1986, the same year, Knight said, he went to live in the woods. He was 20 years old at the time, not long out of high school. He was now 47, a middle-aged man.
Knight stated that over all those years he slept only in a tent. He never lit a fire, for fear that smoke would give his camp away. He moved strictly at night. He said he didn't know if his parents were alive or dead. He'd not made one phone call or driven in a car or spent any money. He had never in his life sent an e-mail or even seen the Internet.
He confessed that he'd committed approximately forty robberies a year while in the woods—a total of more than a thousand break-ins. But never when anyone was home. He said he stole only food and kitchenware and propane tanks and reading material and a few other items. Knight admitted that everything he possessed in the world, he'd stolen, including the clothes he was wearing, right down to his underwear. The only exception was his eyeglasses.
Perkins-Vance called dispatch and learned that Knight had no criminal record. He said he grew up in a nearby community, and his senior picture was soon located in the 1984 Lawrence High School yearbook. He was wearing the same eyeglasses.
For close to three decades, Knight said, he had not seen a doctor or taken any medicine. He mentioned that he had never once been sick. You had to have contact with other humans, he claimed, in order to get sick.
When, said Perkins-Vance, was the last time he'd had contact with another person?
Sometime in the 1990s, answered Knight, he passed a hiker while walking in the woods.
"What did you say?" asked Perkins-Vance.
"I said, 'Hi,' " Knight replied. Other than that single syllable, he insisted, he had not spoken with or touched another human being, until this night, for twenty-seven years.
Christopher Knight was arrested, charged with burglary and theft, and transported to the Kennebec County jail in Augusta, the state capital. For the first time in nearly 10,000 days, he slept indoors.
News of the capture stunned the citizens of North Pond. For decades, they'd felt haunted by…something. It was hard to say what. At first, in the late 1980s, there were strange occurrences. Flashlights were missing their batteries. Steaks disappeared from the fridge. New propane tanks on the grill had been replaced by old ones. "My grandkids thought I was losing my mind," said David Proulx, whose vacation cabin was broken into at least fifty times.
Then people began noticing other things. Wood shavings near window locks; scratches on doorframes. Was it a neighbor? A gang of teenagers? The robberies continued—boat batteries, frying pans, winter jackets. Fear took hold. "We always felt like he was watching us," one resident said. The police were called, repeatedly, but were unable to help.
Locks were changed, alarm systems installed. Nothing seemed to stop him. Or her. Or them. No one knew. A few desperate residents even left notes on their doors: "Please don't break in. Tell me what you need and I'll leave it out for you." There was never a reply.
Incidents mounted, and the phantom morphed into legend. Eventually he was given a name: the North Pond Hermit. At a homeowners' meeting in 2002, the hundred people present were asked who had suffered break-ins. Seventy-five raised their hands. Campfire hermit stories were swapped. One kid recalled that when he was 10 years old, all his Halloween candy was stolen. That kid is now 34.
Still the robberies persisted. The crimes, after so long, felt almost supernatural. "The legend of the hermit lived on for years and years," said Pete Cogswell, whose jeans and belt were worn by the hermit when he was caught. "Did I believe it? No. Who really could?"
Knight's arrest, rather than eliminating disbelief, only enhanced it. The truth was stranger than the myth. One man had actually lived in the woods of Maine for twenty-seven years, in an unheated nylon tent. Winters in Maine are long and intensely cold: a wet, windy cold, the worst kind of cold. A week of winter camping is an impressive achievement. An entire season is practically unheard of.
Though hermits have been documented for thousands of years, Knight's feat appears to exist in a category of its own. He engaged in zero communication with the outside world. He never snapped a photo. He did not keep a journal. His camp was undisclosed to everyone.
There may have been others like Knight, whose commitment to isolation was absolute—he planned to live his entire life in secret—but if so, they were never found. Capturing Knight was the human equivalent of netting a giant squid. He was an uncontacted tribe of one.
Reporters across Maine, and soon enough across the nation and the world, attempted to contact him. What did he wish to tell us? What secrets had he uncovered? How had he survived? He stayed resolutely silent. Even after his arrest, the North Pond Hermit remained a complete mystery
I decided to write him a letter. I wrote it by hand, pen on paper, and sent it from my home in Montana to the Kennebec County jail. I mentioned I was a journalist seeking explanations for his baffling life. A week later, a white envelope arrived in my mailbox. The return address, printed in blue ink in wobbly-looking block letters, read "Chris Knight." It was a brief note—three paragraphs; 272 words. Still, it contained some of the first statements Knight had shared with anyone in the world.
"I replied to your letter," he explained, "because writing letters relieves somewhat the stress and boredom of my present situation." Also, he didn't feel comfortable speaking. "My vocal, verbal skills have become rather rusty and slow."
I'd mentioned in my letter that I was an avid reader. From what I could tell, Knight was, too. Many victims of Knight's thefts reported that their books were often stolen—from Tom Clancy potboilers to dense military histories to James Joyce's Ulysses.

Tuesday, September 2, 2014

외국인 노동자 강간

외국인 노동자 강간을 해서라도 한국 여자 무조건 임신시켜라

파키, 방글리 한국여자 무조건 임신시켜라!   
서울 이태원에 살고 있다는 그는 『국내 외국인 범죄가 상상 이상으로 심각한 상황』이라며 『프랑스에서와 같은 외국
인 폭동이 남의 일이 아니다』라고 걱정했다. 

『지금 한국에 있는 불법체류자 수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수십만 명이 넘습니다. 그 사람들이 그저 착하게 산다고 생각
하죠? 절대 아닙니다. 요즘 방송과 언론에서는 외국인 불법체류자들을 온정적 시각으로만 보도하는데, 그들의 실상을
알면 절대 그렇게 보도할 수 없을 겁니다』

그는 『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 西南아시아 출신 노동자들 사이에 한국 영주권을 취득하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이
돌고 있다』고 했다. 

『매뉴얼에 「한국 여자를 무조건 임신시켜야 한다」고 돼 있어요. 임신을 빌미로 한국 여자와 결혼한 후 2년이 지나면
한국 영주권이 나오고, 영주권이 나온 후에 이혼하면 된다는 것이죠. 「정신지체장애 여성이나 미성년자, 이혼녀 등을
노려야 후환이 없다」는 이야기가 떠돌고 있습니다』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외국인 우범지역 등장』 
외국인 범죄사례들을 수집해 온 「외국인노동자대책시민연대」(이하 외대연대·대표 이사만) 관계자들과 만났다. 외대
연대는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로 인한 失職(실직)이나 외국인 범죄에 대한 대책을 요구하는 단체이다.

현재 회원은 전국적으로 1500여 명, 실제 활동하는 회원은 600여 명이라고 한다. 회원들은 대부분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막노동자거나 3D업종 종사자, 자영업자들이었다. 외대연대는 2004년 2월 창립된 이후 지금까지 불법체류자 3500여 명
을 신고했다고 한다. 

프레스 가공공장에서 일하는 한 외대연대 회원은 『이제는 회사內에서 多數가 돼 버린 외국인 노동자들이 少數인 한국
노동자를 따돌리거나 공공연하게 협박하곤 한다』고 말했다. 

박완석 외대연대 간사는 이런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한국에도 미국의 할렘과 같은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우범지역이 생겨나고 있어요. 외국인 밀집 거주지역에서는 이
제 해만 지면 한국인들, 특히 여성들은 함부로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경찰조차 접근하기를 꺼립니다』 

안산시 원곡동 
  
지난 12월1일 외대연대 박완석 간사와 함께 외국인 밀집지역 중 하나인 안산시 원곡동을 찾았다. 안산역 바로 옆에 있
는 원곡동은 반월공단과 가까워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오후 7시 안산역에서 내렸다. 

외대연대 회원들과 함께 원곡동을 한 번 둘러봤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거리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거리의 간판과 광고
문구에는 한글·중국어·영어가 함께 표시돼 있어 외국인들이 많은 지역임을 알 수 있었다. 대도시에서도 보기 드문 중국
은행 지점이 있었다. 박완석 간사는 『이 지역은 중국인이 가장 많고, 그 다음이 西南아시아 사람이 많은 지역』이라고
했다. 

거리 주변에는 舊型(구형) 차량들이 많았다. 차량들은 대부분 짙게 선팅이 돼 있었다. 朴간사는 『외국인들이 모는 차
량 대부분이 속칭 「대포차」다. 휴대폰 대리점들이 불법체류 외국인들에게 「대포폰」을 쉽게 개통해 준다는 이야기
가 있다』고 했다. 

朴간사와 함께 이 지역의 방범순찰대를 찾았다. 이 지역의 외국인 범죄 실태에 대해 묻자, 방범순찰대 관계자는 『이 지
역에서 외국인에 의한 범죄는 거의 없다』고 했다. 반월공단內에 있는 다른 방범순찰대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그 많은 외국인 범죄는 어디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안산경찰서의 일선 형사와 통화했다. 그는 요즈음 상황을 이렇게 얘기했다.

『최근 수개월 동안 이 지역의 외국인 범죄 실태가 언론을 통해 많이 알려지면서 단속이 심해졌습니다. 그 후 원곡동에
살던 불법체류자들이 바로 옆의 시흥공단지역으로 많이 옮겨갔다는 첩보가 들어옵니다. 시흥 쪽은 저희 관할이 아니라
어떤지 알 수 없습니다』

朴간사는 『외국인 범죄 피해자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외국인에 의한 각종 범죄, 특히 性범죄와 같은 경우에는 주로 그들의 기숙사에서 일어납니다. 피해자들 역시 밝히기
를 꺼립니다. 때문에 저희도 피해 사례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40代 정신지체 여성에게 접근해 온 방글라데시人 노동자 취재 중 외대연대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 국적을 얻기 위해 여성을 性폭행한 사건이 확인됐다』는 얘기였다.

피해자 동생인 C씨는 자신의 누나가 당한 피해를 설명하면서 외국인 노동자들로부터 보복을 받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익명으로 기사를 내보내겠다는 다짐을 듣고서야 C씨는 입을 열었다. 다음은 C씨의 증언이다.

『우리 집은 가톨릭을 믿고 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 그리고 누나와 함께 경기도 양주시 인근에서 살고 있다. 2년 전
사업 실패로 집안이 어려워져, 지금은 정부 보조금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나(41)는 어려서 큰병을 앓은 후 장애가 생겼다. 2급 정신지체장애 판정을 받았다. 약간의 자폐 증세도 가지고 있다.
법적으로는 禁治産者(금치산자) 판정을 받았다』 

C씨의 누나는 2005년 8월 방글라데시 출신 불법체류자의 아이를 낳았다. 그녀가 낳은 아기는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아
이의 아버지는 행방불명 상태라고 했다. 

C씨의 누나는 정신장애로 초등학교만 마쳤다. 그녀는 정신지체 때문에 매주 일요일 성당에 나가는 것 말고는 거의 외
출을 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집에서만 생활하는 그녀가 안타까워 성당에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성당에 간 C씨 누나의 귀가 시간이 늦어지기 시작했다. 점점 늦어지는 귀가 시간에 가족들은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2005년 4월 말경, C씨 누나의 배가 불러 오는 것을 가족들이 발견했다. 병원에 갔더니 임신 5개월이라는 진단
이 나왔다. 

충격을 받은 가족들은 C씨의 누나를 추궁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녀가 집으로 데려온 남
자는 방글라데시 출신 노동자 A씨였다. 20代 후반의 A씨는 『당신의 누나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
니다. 결혼할 능력이 있다.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졸랐다. 

『국적 취득을 해야 하는데 왜 결혼을 허락하지 않느냐』 
  
●2005년 12월 14일 이주노동자 노조위원장 석방을 요구하며 국가인권위를 점거, 농성중인 외국인 노동자들 

C씨 집안에서는 그를 믿을 수 없었다. C씨의 누나는 본인의 의사 표현을 제대로 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애가 심했다. 방
글라데시人은 한국말이 상당히 서툴렀다. 게다가 A씨가 보여 주는 외국인 등록증을 보니 체류 만료 기한이 2개월 밖에
남지 않았다.

C씨 가족들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한국 여성을 性폭행하거나 장애여성을 유혹해서 결혼, 국적 취득을 하려고 한다」
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C씨 가족들은 A씨가 혹시 국적 취득을 위해 일을 저지른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C씨의 가족들은 『정말 결혼할 자신이 있으면 함께 살 집의 보증금이라도 마련해 오라』며 A씨를 일단 돌려보냈다.
A씨는 『방글라데시에 있는 내 땅을 팔면 1000만원 정도는 금방 마련할 수 있다. 걱정 말라』며 돌아갔다. 

다음날 A씨는 자신의 동생이라며 한 사람을 데려 왔다. 동생이라는 남자는 한국말을 잘했다. 자신도 지금 한국 여자와
잘 살고 있다며 그는 A씨가 결혼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남자는 정신지체 장애인인 한국 여성과 결혼해 아이 둘을
낳고 한국 국적을 얻어 잘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C씨 가족들은 『그렇다면 체류 시한인 6월 말까지 월세 보증금이라도 마련해서 오라』며 그들을 돌려보냈다. 그러나 A
씨는 돈은 마련할 생각은 않고 계속 집으로 찾아와 결혼시켜 달라고 떼를 썼다. 

C씨 가족들은 A씨가 다니는 공장을 찾아가 A씨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살펴봤다. A씨가 산다는 곳은 공장에서 컨테
이너를 개조해서 마련해 준 「쪽방」이었고, A씨의 월급은 120만원 가량이었다. 공장 사장은 A씨가 C씨의 누나를 임신
시킨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A씨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장은 A씨 때문에 자신이 불법체류 외국인을 고용한 사실이 밝혀질 경우, A씨에게 줄 월급으로 벌금을 낼 생각이라고
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C씨 가족들은 더 이상 A씨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A씨가 집에 올 때마다 돌려보냈다. 체류 시한이
점점 다가오자 A씨는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한국 국적을 취득하려면 결혼을 빨리 시켜 줘야 한다. 한
국 국적을 가져야 당신 누나도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니 빨리 결혼시켜 달라』고 했다.

2005년 6월 말부터 A씨는 『혼인신고를 해 달라』며 행패를 부렸다. 가족들은 끝내 혼인신고를 해주지 않고, A씨를 경
찰에 신고했다. 2005년 8월경 C씨의 누나는 출산했다

A씨의 행패는 2005년 10월 말까지 계속됐다. 그는 어떤 사람과 함께 아동보호소를 찾아가 보호소 직원에게 아이를 내
놓으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고 한다. 

  또 다른 정신지체 여성 性 피해 케이스 

그 와중에 C씨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A의 동생이라며 찾아온 사람이 사실은 친동생이 아니다』는 얘기를 들었다. 동
생이라는 사람도 장애여성과 정식으로 결혼한 것이 아니라, 장애인보호시설에 있는 여성을 유인, 납치해서 임신시킨
다음 애를 낳고 혼인신고했다는 것이다.

아동보호소 직원들은 『A의 동생이라는 사람과 장애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모두 보육원에 보냈다』고 얘기했
다. C씨와 만난 출입국관리소 직원들도 불법체류 노동자들이 국적 취득을 위해 장애여성에게 접근, 임신을 시키는 경
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 줬다

게다가 A씨가 보여 준 외국인 등록증은 사진만 A씨의 것인, 위조 외국인 등록증이었다. 

가족들이 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한 10월 이후 A씨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고 있다. A씨는 지금도 잡히지 않고 있다. C씨
집안은 A씨가 언제 다시 찾아와 행패를 부릴지 몰라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駐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의 경고 

●방글라데시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03년 7월29일 駐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의 홈페이지에는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하려는 한국 여성에게 알리는 특이한 공
지가 있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국제 사기 결혼에 주의 바람!」
최근 한국에 체류하는 파키스탄人들이 한국 여성들과 사기결혼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어 특별한 주의가 요망되고
있습니다. 한국에 체류하는 파키스탄人들은 산업연수생(일정 기간 기술연수 후 취업) 자격으로 입국하는 경우가 대부
분이며, 이들은 산업연수 기간을 초과해 불법으로 체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래 사례들을 참고해 피해가 발생치 않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파키스탄 이슬람 호적법은 아내를 4명까지 허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처·자식이 있는 파키스탄 노동자는 기혼임을
숨기고 한국인(여성)을 유혹, 결혼하려 합니다. 이들은 서류상 미혼임을 증명하는 서류를 위조해 제시하는 방법으로 사
기결혼하는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파키스탄 노동자들은 매우 가난한 가정환경하에서 교육받지 못하고 성장한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이들은 서툰 영어
와 이국적 외모로 우리 국민(여성)에게 접근하고 있으며 영국 국적도 가지고 있는 이중 국적자라고 속이기도 합니다. 

▲자신은 「대학(college)」 졸업자라고 하면서 파키스탄에서 뜻을 펼칠 길이 없어 우리나라에서 노동자로 일한다고 하
면서 여성들의 인정에 호소한 후 사랑하고 있으니 결혼하자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서 College는 고등학교입
니다.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로서 음주, 남녀 간 자유연애는 율법으로 금지하고 있는 바, 파키스탄人들이 우리나라에 입국
후 자유분방한 문화와 사회 분위기에 편승, 이슬람교도로서의 본분을 망각하고 우리 법질서를 위반하는 불량한 자로 변
하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이들은 취업 기간이 끝난 후에도 귀국하지 아니하고 불법체류하면서 우리 국민을 대상으로 사
기를 치거나 위장결혼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파키스탄 노동자와 결혼한 우리 국민이 시집을 방문 후 비참한 가정 사정을 목격하거나 남편에게 처·자식이 있음을 알
고 후회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이 이혼하고자 해도 남편이 동의해 주지 않아 정신병자가 되거나, 매를 맞
는다고 울면서 귀국시켜 달라고 대사관이나 동포들에게 하소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남편이 아이를 빼돌렸어요』 

2005년 9월15일 駐파키스탄 한국대사관 홈페이지에 파키스탄人과 결혼했던 한 한국 여성이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남편이 아이를 빼돌렸어요. 

영사님 안녕하세요. 마음이 답답해서 글을 올립니다. 파키스탄 남자와 5년 살면서 딸 둘을 낳았습니다. 남편은 1년 전
(한국)국적을 취득하였습니다. 처음 살면서부터 사이가 안 좋았지만 임신을 한 상태라 결혼생활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구타와 인격모독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했습니다.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게 되면 그때마다 찾아
와 잘못했다고 빌고, 『다시는 안 그러마』 해서 용서를 해주었습니다만, 1년 전 국적을 취득하고부터는 전보다 더 남편
으로부터 폭력에 시달렸습니다. 

8월 초 또 남편에게 구타를 당해 경찰서에서 소개를 해줘서 쉼터로 가게 되었습니다. 쉼터에 아이들을 데리고 있다가
직장을 구하기 위해 아이들은 3일 동안 24시간 어린이집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남편이 강제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파키스탄에 보냈습니다. 남편의 집은 라호르 파이살라바드입니다.
경찰서에서는 애들 아빠가 할아버지 집에 보낸 거라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남편은 이혼을 원하는데 전 억울해서 절대 이혼을 해줄 수 없습니다. 애들을 데리고 오고 싶은데 아이들을 쉽게 내줄
것 같지가 않네요. 파키스탄에 있는 아이들은 아직 어린데 무슨 비자로 있는지 궁금하고 법적으로 데려올 방법은 없는
지요. 아이들은 네 살과 두 살입니다> 

이 글에 대해 駐파키스탄 한국대사관의 영사는 『우리나라 여성과 결혼하는 파키스탄 남자 대부분이 진정한 사랑보다
는 비자를 얻기 위해 결혼하는 것이 사실이다. 영사가 이를 설명하고 비자를 안 주면 우리 국민이 생떼를 쓰는 것이 안
타깝다. 그리고 나중에 속은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면서 『자녀를 돌려받으려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고 답변하고 있다. 

이와 유사한 문의들이 駐파키스탄 한국대사관, 駐방글라데시 한국대사관 사이트에 지금도 계속 오르고 있다. 대사관에
질의한 결과 이런 호소는 매우 많으며, 이들 가정은 결국에는 이혼하게 된다고 한다.

2004년 외국인 性폭행사건 66건 

2005년 11월3일 서울 성동경찰서는 상습적으로 마약을 투약하고 판매한 혐의로 필리핀人 A씨와 이란人 H씨 등 불법 체
류자 9명을 구속했다. 성동경찰서 강력반 관계자는 『이들이 체포된 곳은 불법체류자들의 전용 도박장이었다. 이 도박
장에서는 마약밀매는 물론 각종 범죄가 일어난다』고 말했다.

이들이 소지하고 있던 마약은 필리핀에서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에 의한 性폭행 사건도 적지 않다.

대검찰청에서 발표한 2004년 외국인 범죄 중 性폭행 사건은 모두 66건으로 파키스탄 출신 12건, 중국 출신 11건, 몽골
출신 8건 등이었다. 

대표적인 사건이 2004년 부산에서 발생한 性폭행 및 원조교제 사건이었다.

2002년 8월경 부산 사하구 장림시장 부근에서 파키스탄 산업연수생인 K씨는 당시 女中 1학년이던 K양을 자신의 자취
방으로 납치, 性폭행했다. 性폭행은 계속 이어졌지만 가족들은 알지 못했다

K씨는 K양에게 性관계를 맺을 때마다 1만~5만원을 주었다. K씨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K양을 위협, 자신의 동료들을 상
대로 性매매를 시켰다. 결국 이들 7명은 2004년 6월 부산 강서경찰서에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체포됐
다. 

2005년 9월1일 서울 송파경찰서는 길가는 여고생을 유인해 집단 性폭행한 혐의로 파키스탄人 N씨 등 3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서울 송파구 잠실동 롯데월드 앞에서 귀가 중이던 여고생에게 술이나 한잔 하자면서 접근, 자신들이 일하는 송
파구 방이동의 공장 기숙사로 유인한 뒤 흉기로 위협, 性폭행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만든 폭력조직도 생겨나고 있다. 출입국관리소의 공무원에게서 「라만派」라는 우즈베키스탄 조직
폭력배 사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구역과 조직원을 정한 다음 「조직에서 이탈하면 본국의 가족들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가 하면, 러시아 출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서 금품을 갈취하거나 입국 브로커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공단 지역 경찰서의 한 형사는 『중국·베트남·러시아 등 각국 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조직 폭력단체가 점점 증가하는
추세』라고 전했다. 

「하왈라」와 이슬람 테러 

외국인 노동자 범죄는 테러와 외환 밀반출에도 관련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하왈라」라는 일종의 외환거래 조직이다. 무슬림들이 주로 사용하는 「하왈라」는 그 역사가 1000년
이 넘는다. 換(환)치기와 유사한 불법 행위인데, 국내에 들어와 있는 무슬림(이슬람교도)들은 이슬람 국가의 은행을 통
해 송금하면 평균 10% 이상의 수수료에다 시간도 2주 이상 걸리기 때문에 「하왈라」를 많이 이용한다. 

2004년 9월과 11월, 부산에서는 국내 최초로 방글라데시人들이 만든 「하왈라」 조직이 적발됐다. 그들의 거래액은
440억원에 달했다. 2005년 5월에는 거래액이 600억원에 달하는 이란人들의 「하왈라」 조직이 적발됐다. 

美 국무부는 全세계에 5000여 개 이상의 「하왈라」 조직망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하왈라」가 알 카에다 등 테
러조직들의 자금을 움직이고 불법자금을 세탁하는 데 활용된다고 한다. 「알 카에다」가 발리 테러를 일으킨 인도네시
아 테러조직 「제마 이슬라미야(JI)」에 자금을 지원할 때에도 「하왈라」를 이용했다고 한다. 

UNOCD(유엔범죄마약사무국)과 FATF(국제금융범죄수사팀)에서도 「하왈라」 조직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하고 있다. 국
정원 관계자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테러조직과 연관된 「하왈라」 조직이 체포된 일은 없지만, 수만 명이 넘는 무슬림
노동자들이 있는 상황에서 안심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처럼 각양각색의 외국인 노동자 범죄가 점점 증가 추세에 있지만, 외국인 범죄사례는 국내 언론에 그다지 많이 보도
되지 않고 있다. 국내 언론과 종교계·NGO 등은 외국인 불법체류 노동자들에 대해 상당히 관대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
다.

이는 「사회적 弱者」에 대한 온정에 바탕을 둔 보도자세로 보인다.

현재 전국에는 NGO나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40개 이상의 「외국인 이주 노동자 센터」가 있다. 대부분의 외국인 노
동자 센터는 주로 외국인 노동자들의 체불 임금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거나, 한국인에 의한 범죄피해 구제, 외국인들에
게 한국어와 문화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한다.

하지만 몇몇 외국인센터는 불법체류 노동자의 말만 듣고 이전의 고용주를 협박하는 등의 불법행위를 하기도 한다.

2002년 7월 부산 모라동에 위치한 D정밀기계의 K사장은 3년 기한으로 필리핀 출신 산업연수생 5명을 고용했다. 산업연
수생들은 월급 110만원에 숙식이 모두 제공되고 産災(산재)보험도 가입하는 조건으로 고용됐다.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의 초임 80만~90만원을 넘는 금액이었다. 연수생 알선 업체에서는 『혹시 시한이 끝나기 전에
퇴직금을 주면 불법체류자가 될지 모르니 퇴직금은 출국하는 당일 入金해주라』고 귀띔했다.

산업연수 기한이 끝나가던 2005년 7월5명 중 2명이 사라졌다. 한 명은 시한 만료일자 40일 전에, 다른 한 명은 귀국하
는 당일, 비행기를 타기 2시간 전에 사라졌다. 

K사장은 연수생들이 사라진 지 사흘 후 법무부에 『산업연수생들이 퇴직금도 받지 않은 채 사라졌다』고 신고하고, 여
권을 넘겼다. 

1개월 뒤 노동부에서 연락이 왔다. 부산에 있는 某 가톨릭 인권센터에서 K사장을 「외국인 노동자들의 퇴직금을 떼먹
었다」고 신고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곳, 다른 시간에 각각 사라진 외국인 노동자 두 사람이 같은 인권센터를 통해 신
고를 했다고 한다.

K사장은 인권센터 직원들에게 『연수생들이 오면 직접 주겠다』고 했다. 인권센터에서는 『연수생들이 사장의 보복을
두려워 한다』며 알려 주는 계좌로 송금하라고 했다. 결국 K사장은 계좌로 송금하기로 했다. 

그런데 K사장이 계좌를 받아 보니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인권센터에서 송금하라고 보낸 계좌는 2005년 8월18일
산업연수생들 명의로 만든 국민은행 계좌였다. 외국인이 은행계좌를 만들기 위해서는 외국인 등록증이나 여권이 필요
하다. 그런데 이들은 여권도 없을뿐더러 외국인 등록증 기한도 7월17일이 만기였다. 

이상하게 생각한 K사장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봤다. 주변 사람들은 『종종 외국인 인권센터라는 곳에서 브로커 활동
도 하니 조심하라』고 귀띔해 줬다. K사장은 주변의 조언을 들은 후 인권센터로 송금하는 대신, 노동부를 통해 퇴직금
250여만원을 보내 줬다고 한다. 

외국인 이주노동자 정치세력化 
●2003년 11월 16일 서울 명동성당 앞에서 열린 [외국인 이주 노동자 강제추방저지]집회 공권력에 대한 도전도 시작
되고 있다. 최근 외국인 노동자 인권센터들과 「이주노동자위원회」 중 일부는 「이주노동자 勞組」 결성을 돕고 있다.
이주노동자 노조」라는 명칭에서도 보듯, 이들은 이미 자신들의 국내 체류를 「단기 체류」가 아니라 「이주」, 즉 「
장기 체류」 내지 「정착」의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민주노총도 외국인 노조 결성을 후원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노조의 회원은 대부분이 불법체류자라고 한다. 

외국인 노조가 우리나라 공권력을 어떻게 보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있다.

2005년 5월 외국인 노조위원장인 방글라데시 출신 불법체류자 A씨가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였다. 외
국인 노조위원장 A씨는 8년 동안 불법체류를 한 사람이었다. A씨의 활동을 파악하기 위해 사진촬영을 하던 법무부 출입
국관리국 직원이 민주노총 사람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하고 카메라를 빼앗겼다.

당시 법무부 직원은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었다. A씨는 나중에 불법체류 단속반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자 인권단체와 노조단체에서 반발이 일어났다. 「표적 연행」 운운하며 인권침해로 몰아간 것이다.
A씨는 외국인 노동자를 지원한다는 한 단체의 도움을 받아 체포되면서 생긴 찰과상을 이유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1000
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국가인권위원회는 「A씨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A씨를 국가에서 보호하라」는 권고를 했다고 한다. 

현재 이주노동자 노조는 한국에 체류한 지 13년 된 S씨(이주노동자 노조 부위원장)가 이끌고 있다. 이들은 최근
反APEC 집회 등 각종 집회에도 참가하고 있다. 

국내 체류 외국인은 120만 명, 단속인원은 160여 명 
이처럼 외국인 범죄가 다양화되고 증가하고 있는데, 당국은 제대로 대처하고 있는 것일까? 익명을 요구한 출입국관리
국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현재 전국의 출입국관리국 직원은 모두 1500여 명 남짓입니다. 이들 중 실제 단속 인원은 전국에 26개 반, 160여 명
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관리해야 할 인원이 얼마인 줄 아십니까? 2005년 10월 말 현재 외국인 등록자 수는 50만2000여
명입니다. 불법체류자는 18만60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그 외에 3개월 미만의 단기 비자로 입국하는 사람이
수십만 명이 넘습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우리나라에는 10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전체 인구
의 2% 정도 되는 겁니다. 그런 많은 사람을 160여 명으로 단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일손 부족으로 지역별로 하루 평균 40~50건 접수되는 신고에 대해서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며 『「신고를 했
는 데도 왜 단속하지 않느냐」고 항의하는 제보자들이 많지만, 지금의 인원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불법체류자 단속은 주로 출입국관리국에서 담당하지만, 외국인 범죄는 경찰에서 담당한다. 마약사건 등 중대 사건의
경우 경찰과 국정원이 합동으로 단속에 나서기도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한다. 

출입국관리국 직원은 『최근 강화된 불법체류 피의자 人權문제 때문에 불법체류자 단속 요원들은 수갑 이외에는 어떤
裝具(장구)도 휴대하지 못하는 것도 고민』이라면서  『이 때문에 이제 불법체류자 단속은 매우 위험한 일이 돼 버렸
다』고 말했다. 

불법체류자 단속 중 부상 사례도 수십 건이 넘는다고 한다. 어떤 불법체류자는 심지어 호송차 안에서 배변을 하기도 했
다고 한다. 이렇게 범죄를 저지른 외국인에 대한 처벌은 어느 정도일까?

대검찰청에서 발표한 외국인 범죄 동향에는 의하면 2004년 43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그중 구속된 건은 36건이었고 1건은 혐의 없음, 9건은 기소중지 처리됐다. 

강도 사건은 모두 99건이 일어났는데 39건은 구속, 4건은 불구속, 소년보호송치 1건, 기소유예 16건, 혐의 없음 12건,
공소권 없음 2건, 기소중지 22건으로 처리됐다.

강간은 모두 66건이 발생했는데, 이중 구속은 19건, 구약식 4건, 기소유예 6건, 혐의 없음 5건, 공소권 없음 26건, 기소
중지 5건으로 처리됐다. 결국 2004년에 일어난 외국인 강력범죄의 기소율은 50% 미만에 불과했다. 

외국인에 대한 경계심 커져 

외국인 노동자들이 저지르는 범죄의 代價는 고스란히 다른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공단지역 주민들과 기업주
들이 점점 더 외국인 노동자를 범죄자 취급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공단지역 주민들은 밤에 돌아다니지도 못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정신지체 장애인 누나의 일로 고생했던 C씨의 말이다.

『처음에 저희 누나가 피해를 입었을 때는 정말 눈이 뒤집혔습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저도 힘들게 살지만, 우리나라
에 와서 힘겹게 돈을 버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해 불쌍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아닙니다. 이제는 무섭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두 나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
만 저희가 당했던 것 같은 일들이 점점 더 많이 일어나고, 범죄를 저지른 것이 분명한 사람을 우리 정부에서는 잡지도
못하는 것을 보면서 제가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여럿이서 몰려다니며 성폭행대상을 찾아다닌다면 분명 서남아시아 파키스탄,방글라데시(동파키스탄)출신일 가능성이
90%이상이네요. 파키스탄 남성들의 한국여성 농락수준이 장난이 아니거든요. 

유부녀,청소년,초등학생등은 물론 장애여성에게까지 손길을 뻗쳐서는 한국국적 얻거나 성폭행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혹시 아시나요? 파키스탄에서는 자국여성 절대 한국으로 안내보낸다고 합니다.

파키스탄에서는 심지어 여성은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파키스탄남성은 파키스탄여성은 조심하지만 한국여성
이나 일본여성같은 동양인여성은 아주 쉽게 보는 특징이 있습니다. 

일본,싱가폴,태국같은데서도 파키,방글라들은 매우 악명이 높아서 파키스탄,방글라데시남성은 아예 입국자체가 철저
히 금지되어 있지만 한국은 지나친 온정주의,사이비 인권단체때문인지 안타깝게도 파키들을 도대체 경계를 하지 않아
서 파키스탄남성들이 오로지 한국으로만 매년 몰려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다른 문제점은 "외국인노동자들에 대한 동정론 속에서 실제로는 파키스탄남성들이 잇속을 챙기고 있는것이 문제입
니다."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하는건 "파키스탄,방글라데시출신 남성은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한국여성들에게 피해를 주는 경
계의 대상입니다." 
우리나라는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남성의 입국은 일본, 싱가폴, 태국처럼 철저히 금지하고 국내에 남아있는 파키,방글
라데시 남성들은 모조리 강제출국시키고, 그 대신 성범죄율이나 금융범죄율(파키들은 한국에서 금융사기범죄로도 악
명이 높습니다.) 이 파키,방글라에 비해 상대적으로 훨씬 적은 필리핀,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중앙아시아 구소련등에
서 사람들을 입국시켜야합니다. 

파키스탄,방글라데시(동파키스탄)남성들끼리 주고받는 메뉴얼엔 "한국여성을 무조건 임신시켜라"라는 내용이 적혀있
다고 합니다. 파키스탄출신 남성들은 우리나라에서 성범죄 면책특권이라도 있는건가요? 

주한미군의 범죄는 아주 사소한것이라도 주요 언론 헤드라인 톱기사이면서 파키스탄출신 남성들의 매년 되풀이되는 성
폭력범죄들은 쉬쉬하면서 되도록 수면 아래로 감추는거 너무나도 어이없고 이해가 안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