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August 30, 2014

여행의 재미

여행을 다닐 만큼 다닌 분이라면 이런 곳을 찾지 않을까? 혹은 남들이 가지 않은 장소를 여행지로 선택하고 싶다면 아래의 리스트를 참고하길 바란다.
바로 2013년 전 세계에서 가장 방문객이 적은 10개국이다.
아래 10개국은 그 아름다운 경치에 비해 어쩌면 과소평과된 나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관광객의 숫자가 적으니 어쩌면 북적이는 다른 휴양지에 비해 조용한 휴가를 누릴 수 있는 완벽한 장소가 아닐까?
10. 팔라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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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수: 105,000명
위치: 남태평양 서부 끝


9. 몰도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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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수: 96,000명
위치: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중간


8. 동티모르
timorleste
방문객 수: 78,000명
위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와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사이


7. 도미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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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수: 78,000명
위치: 카리브 해의 서인도제도 동부


6. 세인트빈센트 그레나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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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수: 72,000명
위치:서인도 제도 남동부


5. 앵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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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수: 69,000명
위치: 카피브 해에 위치한 영국령의 산호섬


4. 리히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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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수: 60,000명
위치: 스위스와 오스트리아 중간


3. 니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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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수: 7,000명
위치: 남태평양의 섬


2. 몬트세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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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수: 7,000명
위치: 카리브 해에 위치한 영국령의 섬


1. 키리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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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문객 수: 6,000명
위치: 태평양 중부의 섬. 하와이에서 5시간 비행거리.

Wednesday, August 27, 2014

30대에 후회안하기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간을 꼽으라면 단연 30대가 아닐까 싶다. 

마흔 이후에도 정신 없이 살아야 하지만 30대에는 결혼과 출산, 육아 등 인생에서 정말로 중요한 '통과의례'가 참 많은 탓이다.

미국의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인 레딧에서는 흥미로운 조사가 이뤄졌다. 30대를 지나고 이제 마흔 이상이 된 성인 남녀에게 '30대에 당신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공통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마흔이 지난 뒤 돌아봤을 때 서른에는 후회하는 것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타인의 이목을 너무 의식했다는 것이다.

'30대가 지나면 후회하게 되는 11가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마흔을 넘긴 사람들이 꼽은 30대에 하지 못해(또는 벗어나지 못해) 후회하는 것들을 소개한다.
  
via wikihow.com


1. ~해야 한다는 의무감(the shoulds)

30대가 되면 전보다 더 심한 사회적인 압박을 느끼게 된다. 집을 마련해야 한다, 아이를 낳아야 한다, 결혼을 해야 한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 등등. 

서른 이후에는 이런 의무감에서 자유롭지 못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나이가 지난 뒤에는 오히려 ~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사실을 후회한다고 한다.

남과 비교해서 괜히 루저가 된 기분에 휩싸일 필요는 없다. 인생은 한번 뿐이다. 당신 자신의 삶을 살아라.


via drjillsmithbeautyblog.com


2.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Not spending time with parents)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삼십대 나이에 부모님과 시간을 함께 보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당신이 30대의 나이에는 부모님이 비교적 건강하게 활동하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을 보내고 사십, 오십이 되면 부모님도 함께 연세가 드신다. 대단한 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함께 산책을 하고, 영화 한편을 감상해도 좋다. 부모님은 당신을 기다리시지 않는다.

via lifeevolver.com

3. 일을 최우선으로 삼은 것(putting work first)

지금 30대의 나이라면 꼭 명심할 것이 있다. 일을 최우선으로 삼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는 점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으면 나중에 만회할 방법이 거의 없다.

돈을 많이 벌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보상해 주겠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짓이다. 미래를 위해서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고 선배들은 조언한다.

via thehealthymind.com

4. 부정적인 사람들과 시간을 보낸 것(spending time on negativity)

서른이 넘으면 사람을 보는 눈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많은 이들이 서른 이후에도 잘못된 만남으로 시간을 낭비한다.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부질없이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서 너무 애쓰지 말길 바란다. 마흔을 넘긴 사람들은 대부분 부정적인 사람들과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한 것을 가장 후회했다.

via elitedaily.com

5. 서른이면 어른이라고 생각한 것(thinking your 30s was old)

당신이 대학교 시절을 생각해 보라. 고등학교 때와 비교하면 당신은 이제 어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대학을 졸업을 하고 나면 풋풋한 대학생이 아이들처럼 보일 것이다.

서른의 나이도 그렇다. 사십, 오십, 육십이 되면 서른의 나이는 '아이'처럼 느껴진다. 당신이 30대에 이런 말을 하고 있지는 않나 돌아보길 바란다. "내 나이에 그런 일을 어떻게 해!"라고 말이다. 당신은 이제 고작 삼십대에 불과하다.


via peoplepolarity.com


6. 당신 자신을 최우선으로 삼지 않았던 것(not putting yourself first)

삼십대의 나이에는 당신 자신을 빼고는 모든 사람들을 최우선으로 삼았을 것이다. 남편(또는 아내), 자녀들, 친구들, 동료 등등.

그런데 자신이 행복하지 않고서는 절대 타인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진리를 잊지 말라. 남에게도 너그럽고 관대해야겠지만, 우선 스스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삼십대가 지난 뒤에 많은 사람들이 이점을 후회했다.


via womensfitnessmagazinephotos.blogspot.com


7.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것(not taking better care of your body)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은 이제 20대와는 몸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크 푸드를 여전히 먹고 있고, 운동도 좋아하지 않는다.

30대가 지나면 반드시 건강을 돌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게 된다. 사십대에 접어들게 되면 남녀 모두 급격히 신체적 기능이 떨어진다. 이제 내리막길을 걷는 것이다. 운동을 하고 건강을 돌보는 일에 소홀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모두가 입을 모은다.


via brisbanetimes.com.au


8. 도전을 하지 않았던 것(not taking chances)

앞서 언급했듯 30대의 나이에는 꼭 해야만 하는 의무감들이 많다. 물론 이런 의무감은 당신을 소극적으로 살게 만든다. 그런데 지나고 보면 한살이라도 젊을 때 도전을 하고 위험을 감수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된다.

지금 너무 안정적인 삶만을 추구하고 있다면, 조금 용기를 내서 도전해 보는 것이 어떨까.


via financeelements.com


9. 저축과 투자를 충분히 하지 못한 것(not saving and investing enough)

설문에 응답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크게 후회한 것들 중 하나라고 한다. 좀더 일찍 돈을 아끼고 저축과 투자를 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30대에 일찍 저축을 하고 은퇴를 대비한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 보다 훨씬 먼저 은퇴할 수 있을 것이다.


via lifehacker


10. 더 많이 여행하지 못한 것(not traveling enough)

아마 이런 대답은 20대에도 후회했을 것이고, 40대에도 후회했을 것이고, 50대에도 후회했을 것이다. 그렇다. 늘 여행하지 못한 것을 사람들은 후회했다.

지금이 바로 적기다. 호화 유람선을 타거나, 고급 리조트로 떠날 필요는 없다. 그냥 가볍게 떠나라. 그리고 건강할 때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세상을 보고 느껴라.


via margiewarrell.com


11.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너무 많이 의식한 것(caring too much about what others think)

인생은 결국 자신의 것이다. 남이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목을 의식해서 인생을 낭비하기엔 당신은 너무 젊고 멋지다.

유행하는 옷을 사고, 남들이 가는 맛집에 가고, 없는 돈에도 비싼 자동차를 살 필요는 없다. 그저 당신 자신의 삶을 살면 된다. 인생에서 주인공은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Friday, August 22, 2014

여성의 외도

저는 이제 50이 조금 넘은 평범한 여자입니다.
남편은 저와 아이들만 남겨두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가 버려 제가 일을 하여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합니다.
다행이 남편은 아파트를 한 채 남겨두고 떠났기에 그래도 그만하기에 다행으로 알고 삽니다.
남편과 사별을 하자 두 아이와 저의 입에 풀칠을 하고 또 애들의 학비 조달에 안간힘을 쓰다보니 전혀 다를 것에는 신경을 쓸 겨를도 없었고 또 정신적인 여유도 없었습니다.
자고 나면 밥하고 애들 깨워 밥 먹이고 그러면 고사리 손을 내밀며 무엇을 사야하고 아니면 무엇을 하여야 한다며 벌리면 주머니로 손이 들어가기 전에 먼저 긴 한숨을 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등록금을 내어야 하는 주기는 왜 그렇게도 빨리 오던지.......
혼자서 두 아이의 학자금을 장만하고 먹이고 입히는 것이 그렇게 수월하지만은 안 하였습니다.
이 것을 하면 수입이 많을까?, 아니면 다른 것을 해 볼까? 정말 안 하여 본 것이 없을 정도로 갖가지 일을 다 하여 보았습니다. 행상, 파출부, 식당의 설거지, 공장의 근로자, 막노동판에서 모래나 벽돌 나르기 등 등 정말 안 하여 본 것이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놈이 그놈이었고 수입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별 차이가 없어서 쪼들리기는 매 일반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손을 놓아버리면 두 아이의 학교는 물로 입에 풀칠마저 힘든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저는 눈을 뜨면 공사장이나 식당 행상 파출부 아니면 공장으로 달려가 일을 하였습니다.
물론 저도 여자라 밤이면 죽은 남편의 품이 그리워 한숨으로 지세우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두고 다른 남자의 품으로 간다는 것은 죽은 남편은 물로 아이들에게 못할 짓이고 저 자신에게도 못할 짓이라고 생각하였기에 아주 힘이 들면 식당이나 다른 곳에서 먹다 남은 술을 모아 놓은 것으로 그리움을 달래며 목을 추기고 꿈결에서나마 죽은 남편의 품에 안기려고 꿈속을 헤매기를 반복하는 그런 힘든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잠을 청하여 아침에 눈을 뜨면 얼마나 울었던지 제 눈시울은 퉁퉁 부어있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밥을 하고 아이들을 깨워 밥을 차려주고는 먹는 둥 마는 둥하고는 집을 나와야 하였습니다. 그런 생활은 거의 십 수년을 반복을 하자 드디어 큰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자 조금 경제적인 여유도 생겼고 시간적인 여유도 생겼으나 일이 몸에 배인 터라 쉬면 몸만 더 아팠습니다.
그리고 딸아이마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자 두 아이는 저에게 그 동안 고생을 하였다며 이제부터는 자기들이 그 엄마의 노고에 보답하겠으니 힘든 일을 그만 두라고 하자 저는 밤새 울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두 아이들의 결혼 문제를 생각하면 쉴 수가 없었습니다. 남들보다 많은 혼수품은 준비를 못 하더라도 기본을 갖추어서 혼인을 시켜야 처가나 시가의 눈 밖에 안 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저였습니다.
혼수품 빈약하다고 처가에서 눈총을 받고 시가에서 이혼 운운한다는 이야기를 TV나 방송으로 많이 들었던 저는 두 아이에게 남부럽지 않은 혼수품을 장만하여 시집 장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전까지는 두 아이의 학비를 벌기 위한 뼈를 깎는 일이었다면 두 아이가 취업을 한 후의 뼈를 깎는 일은 두 아이의 결혼 준비를 위한 일이 시작이 된 것입니다.
그 때부터 제 일은 종전보다 힘은 덜 들었고 일에 보람이 따랐습니다. 새 식구를 두나 맞이하는 터전을 닦는다는 좋은 기분이었으니 힘이 나고 용기도 났습니다.
두 아이도 엄마인 나의 고생에 보답하듯이 월급을 타면 봉투 채로 저에게 주고 꼭 필요한 용돈만 가져가는 저를 빼어 닮은 왕 짠돌이 짠순이가 되어 저의 힘을 더 나게 하였습니다.
딸아이를 먼저 시집을 보내기로 아들과 딸에게 말하고 사귀는 남자가 있으면 데리고 오라고 하자
처음에는 없다고 발뺌을 하던 딸아이가 어느 날 건장한 남자를 데리고와 사귀는 남자라고 하기에 딸아이가 싫다고 완강하게 거부하였으니 그 청년의 사주와 딸아이의 사주를 들고 궁합을 보았습니다.
제가 시갓집과 친정엄마가 궁합을 보고 반대하는 결혼을 하였기에 이런 팔자라고 생각을 하였기에 본 것입니다.
그러나 딸아이와 그 청년의 궁합은 두 곳에서 보았는데 공통으로 좋았습니다.
그 청년의 집에서도 궁합을 보고는 저보다 더 달려들며 딸을 달라고 애원을 하였습니다.
혼수도 필요가 없고 오직 딸아이 몸만 오면 환영한다며 안달을 부리자 저는 못이기는 척하고 그 청년을 사위로 맞이하는 결혼식을 조촐하게 올려주었습니다. 막상 딸아이가 시집을 가자 그 허전함은 남편을 사별하고 나서의 허전함보다 더 허전하였습니다.
그리고 딸아이와 사위가 신혼여행에서 다녀오자 저는 사돈댁에 이바지를 사지를 안하고 정성스럽게 만들어서 딸아이와 사위 편으로 보내고 평소의 저로 돌아가 이제 아들의 혼수 준비를 위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 것이 작년 봄의 일입니다.
내년 봄 즉 오는 춘삼월에는 아들을 혼인시키기로 마음의 작정을 한 터라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딸아이가 시가에 들어가고 몇 일이 지난 어느 날 딸아이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홀 아버지인 사위의 아버지가 저를 만나 저녁을 대접하고 싶다는데 어떠냐고 물어 처음에는 사양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딸아이는 몇 일을 계속 전화를 하여 자기 시아버지가 잘 키운 달 준 것에 대한 보답의 인사를 안 하면 자기 마음이 안 편하니 대접을 해야한다며 자꾸 전화를 하라고 한다며 저에게대접을 받으라고 딸아이와 사위가 번갈아 가며 권하기에 그도 너무 사양을 하면 예가 아니다싶어 승낙을 하였습니다.
마침내 사돈과 만나기로 한 날 저는 평소 안 하던 화장도 조금하고 머리도 손질을 하였습니다. 평소처럼 가면 딸아이의 체면이 손상될 기분이라 그리 한 것입니다. 집에 있으니 사위와 딸아이가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저는 사위가 운전을 하는 차를 타고 행복한 마음으로 사위와 딸아이를 번갈아 보며 사돈이 기다리시는 곳으로 가자 사돈은 먼저 나와 계시다가 자기 아들과 며느리인 제 딸 그리고 제가 들어가자 일어서서 공손하게 인사를 하시기에 저도 고개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고 사위와 사돈이 같이 앉고 저는 딸아이와 나란히 앉았습니다.
50대 중반의 사돈은 연방 제 딸아이인 자기 며느리를 보며 좋아서 웃음을 계속 웃었습니다.
"사 부인 저렇게 곱게 키운 딸 저에게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돈이 말씀을 하시기에
"아니어요, 저렇게 믿음직한 사위를 제게 갖게 하신 사돈께 감사 드립니다"
하며 고개를 숙이자
"음식 솜씨도 먼저간 안사람 뺨치게 잘하고 인사성도 좋고 사귐성도 좋아 이제 한이 없습니다"
하시기에
"그렇게 예쁘게 보아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고 얼굴을 붉히자 사위가
"아버지, 장모님 서로 자기 자랑 그만하시고 식사나 해요"
하고는 주문을 하자 저는 보도 못한 갖가지 음식이 연속으로 들어와 저는 눈이 휘둥그렇게 떠지는데 딸아이가 그것을 보고 가볍게 꼬집자 정신을 가다듬고 딸아이가 먹는 것을 보고 똑같이 따라서 먹었습니다.
"자 사 부인 술도 한잔 드시죠"
하시기에
"저 술 못합니다"
하자 딸아이가
"아버님 우리 엄마 술 잘 마셔요"
하고는 제 손에 잔을 쥐어주자 하는 수 없이 공손하게 내밀자
"혼자 살면 느는 것이 술이죠"
하며 사각 병을 들어 제 잔을 채워주셨는데 사위가 웃으며
"과부 마음 홀아비가 알지 누가 알아요"
하자
"허~저놈이 아버지와 장모 놀리네"
하며 웃으시기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이자 자기의 잔을 제 앞에 들이밀기에 잔을 들어드리자 제 잔에 박치기를 하고는
"자 한잔 드시죠"
하고 단번에 잔을 비우시기에 소주 정도겠지 하고 저도 단숨에 마셨습니다. 목이 짜릿한 것이 소주와는 달리 향은 무척 좋았으나 무척 독하였습니다.
딸아이와 사위가 저희 집까지 데려다 주겠지 하는 마음으로 사돈이 권하는 술을 계속 받아먹었습니다. 식사가 거의 끝이 나자 딸아이와 사위가 일어나며
"아버지 장모님 우리 친구들과 약속이 있어서 먼저 일어납니다"
하며 일어나기에 놀라
"나 안 데려다 주고?"
하고 묻자 사위가 봉투를 손에 쥐어주며
"중요한 약속입니다, 장모님 택시 타고 들어가세요"
하자 딸아이가
"그래 엄마 이이 친구들과 중요한 약속이야 미안해"
하자 사돈께서
"그래 가봐, 내가 사부인 모셔 들릴게"
하자 딸아이가
"아버님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고는 사위의 팔짱을 끼고 나갔습니다. 딸아이와 사위가 나가자 한동안 말이 없는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되었습니다.
"사 부인 우리도 심심한데 노래연습장이라는 곳에 가시겠습니까?"
혼자서 자작을 하시던 사돈이 말씀하시자
"저 노래 못 불러요"
하고 대답을 하자
"저도 음치입니다"
하며 웃으시기에
"다음에 가시죠"
하자
"사부인 함부로 뵙기 곤란하니 그렇죠"
하시기에
"..........."
말이 없자 일어나시더니
"자~그럼 가시죠"
하시기에 얼떨결에 일어나 사돈의 꽁무니를 따라나가자 사돈은 계산을 하시고는 음식점 밖으로 나가시더니 사방을 두리번거리시더니
"아~저기 있군요"
하고 웃으시며 앞장을 서서 가시기에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곳은 노래 연습장이 아니고 노래방이었습니다. 노래연습장에서는 술을 안 팔았는데 노래방에서는 술을 판다고 하며 사돈은 뭔가를 주문하고
"10번 룸이랍니다"
하고는 앞장서시더니 10번이라고 적힌 방으로 들어가시자 저도 따라 들어갔습니다.
잠시 후 술과 과일안주 오징어와 마요네즈 우유 그리고 얼음이 담긴 통이 들어왔습니다. 사돈은 잔에 우유를 채워주고 술을 다른 잔에 또 채워주고는 그 안에 얼음을 넣어 저에게 주고는 자신의 것도 그렇게 하시더니 식당에서와 마찬가지로 술잔을 제 앞으로 내 밀기에 저도 내밀자 제 잔에 부딪치시더니 조금 마시고 우유를 마시기에 저도 그렇게 따라하였습니다.
"제가 먼저 하죠"
사돈은 노래 곡목이 적힌 책을 펴고 웃으며 말하시기에
"네"
하고 대답을 하자 리모콘으로 입력을 하고는 마이크를 들고일어나셨습니다.
잔잔한 음악이 나오더니 사돈께서 가사를 보시며 마지막 잎새라는 노래를 구성지게 부르셨습니다.
"허~어, 그렇게 앉자 계시지 말고 이리 오세요"
일 절이 끝이 나자 저를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부끄러웠으나 권유를 뿌리치면 사돈께 예의가 아니다는 생각에 일어나 옆에 서자 노래를 부르셨습니다. 거의 끝이 나려하자 사돈은 저에게 책을 주시며 선곡하라는 눈치를 주시기에 저도 돌아가는 삼각지를 선곡하였습니다.
제 노래가 나오자 사돈은 갑자기 제 어깨를 잡고 어깨동무를 하셨습니다.
노래 가사는 보이지 않고 몸이 바르르 떨리는데 사돈이 다른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도와주었습니다. 전 노래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 모르게 노래가 끝이 났습니다.
"자~쉬었다 하죠"
사돈은 어깨동무를 풀지도 않고 소파에 같이 나란히 앉았습니다.
"사부인 우리도 이제 즐겁게 삽시다, 늙었지만"
하며 고개 숙인 저를 끌어안으며 말하시기에
"딸아이나 사위가 보면....."
하고 말을 흐리자
"여기는 귀신도 몰라요"
하시더니 제 얼굴을 잡고 키스를 하였습니다.
"아~이러시면...."
하며 사돈을 밀치자
"홀몸으로 아이들 뒷바라지한다고 사부인이나 저나 고생하였으니 이제는 즐겨야죠"
하시더니 힘주어 끌어안자 온몸에 힘이 탁 풀리며 나른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제 입술에 입술을 대고 빠시자 저는 그만 혀를 사돈의 입안으로 들이밀었습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처음으로 남자의 입안으로 제 혀가 들어간 것입니다. 사돈을 사돈이 아닌 남자로 느낀 것에 대한 죄책감이 생겼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는 생각을 하며 사돈의 몸에서 남자의 찐한 향기를 음미하였습니다.
사돈은 제 혀를 빠시며 제 가슴을 주무르시더니 급기야는 제 보지 둔덕을 더듬으시자 저는 사돈을 밀치고
"더 이상은 안 되요"
하자
"사부인 우리들의 비밀만 지키면 아무도 모릅니다"
하며 제 보지 둔덕을 계속 만졌습니다.
"아~~~~"
저는 반항보다 오히려 사돈이 만지는 손을 보지 둔덕 위로 눌렀습니다. 사돈은 저의 그런 행동에 힘이 나고 용기가 생기셨는지 치마 안으로 손을 넣고는 또 팬티 안으로 넣더니 손가락으로 제 보지 구멍에 끼우고는 저를 끌어안으며
"사부인도 많이 젖었군요"
하기에 얼굴을 붉히자 제 손을 잡아당겨 자기 좆에 가져다 주었습니다.
십 수년을 남자의 좆을 그림자도 못 모았던 저는 사별한 남편의 좆을 떠 올려보았으나 가물가물하였습니다. 사돈은 그런 제 심정을 마치 아시는 듯이 지퍼를 내리시더니 좆을 끄집어내어 제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만져 보았습니다. 아니 실눈을 뜨고 보았습니다. 십 수년 그림자도 못 보았던 남자의 좆이 보였고 그도 제 손에 쥐어져 있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손자의 고추나 보지 남자의 좆은 못 보리라고 생각하고 살던 저의 눈앞에 남자의 좆이 있었고 그도 제 손아귀에 쥐어져있었으니 그 얼마나 감격스럽겠습니까?
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사돈의 좆을 입으로 물고 빨았습니다. 지린내가 조금 났지만 얼마든지 참을 수가 있었습니다.
"으~~~~~~"
생각도 못한 저의 행동에 사돈은 놀라며 신음을 내 질렀습니다. 고개를 조금 돌려 사돈의 얼굴을 보니 사돈은 지긋이 눈을 감고있었습니다.
사별한 남편과 결혼 전에 여인숙이며 야산을 전전하며 섹 스를 하던 기억이 떠올라 저는 사돈의 좆을 잡고 마구 흔들며 빨았습니다.
사별한 남편이 결혼 전에 가장 좋아하던 것이 제가 빨아주고 흔들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사돈은 손을 제 가슴속에 넣고 조금은 늘어진 제 젖가슴을 주물렀습니다.
"사부인 더러운데 먹겠어요"
한참을 흔들고 빨자 사돈이 물었습니다.
"........."
저는 아무 말도 업이 계속 흔들고 빨았습니다. 사별한 남편의 좆 물을 먹었던 기억이 떠오르며 사별한 남편의 잊혀진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눈시울에 가는 이승이 맺혀진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 뜨거운 사돈의 좆 물이 제 목젖을 두들겼습니다.
사돈의 좆 물이 제 입안으로 들어오자 저는 사돈을 올려다보고 붉혀진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먹었습니다. 사돈은 제 붉어진 얼굴을 쓰다듬으며 눈을 감고 좆 물을 제 입안에 싸주었습니다.
다 들어오자 저는 사돈의 좆을 깨끗하게 빨아주고 바지 안으로 집어넣으려 하자
"이제 사부인을 내가 즐겁게 해 드리죠"
하시더니 제 치마를 들치고 팬티를 벗겼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팬티와 바지를 한꺼번에 내리려 시기에
"여기서는...."
하고 말을 흐리자
"그럼 여관으로?"
하시기에 고개를 끄덕이자 제 가방을 가리키며
"그 안에 술과 오징어 넣고 가요"
하시기에 웃으며 남은 술과 오징어를 가방에 넣고 그 곳을 빠져 나왔습니다.
"저기 있네"
하시더니 사돈이 여관 골목으로 들어가 후문으로 여관으로 갔습니다.
"섹 스 한지 너무 오래되어 잘 될지 모르겠네"
하시기에
"저도 남편과 사별하고 처음인데..."
하며 말을 흐리자
"그럼 우리 처음으로 동정을 주고 처녀를 주는 마음으로 해요"
하시기에
"네"
하고 대답을 하자 저의 치마와 상의를 벗기시기에
"부끄러워요, 팬티와 브래지어는 제가...."
하고는 침대 위의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벗었습니다.
사돈도 옷을 전부 다 벗으시고는 이불 속으로 들어오시더니 제 몸 위에 몸을 포개고 키스를 하며 좆으로 제 보지 둔덕을 비비자 제 보지에서는 십 수년만에 처음으로 많은 음수가 쏟아졌습니다. 급한 마음으로 저는 손을 아래로 내려 사돈의 좆을 잡고 제 보지 구멍에 대어주었습니다.
"아~들어와요"
사돈의 좆이 제 보지 안으로 들어오자 키스를 멈추고 고개를 돌려 소리쳤습니다.
"아~그래요 들어갔어요"
하며 사돈이 저를 보며 웃었습니다.
"너무 커요"
하자 사돈은 웃으며
"사부인 보지 구멍이 작은 거죠"
하시기에
"그런 야한 말씀하지 마세요"
하고 고개를 외면하자 천천히 펌프질을 하시며
"죄송합니다"
하고 웃었습니다. 십 수년을 여자 아닌 여자로 지내온 제 보지 안에 남자의 좆이 박인 것입니다. 그도 십 수년을 공들여 키워 준 딸의 시아버지의 좆이 제 보지 안을 꽉 매우고 있는 것입니다.
"아~좋아요"
하고 엉덩이를 어렵게 흔들며 사돈의 등을 끌어안았습니다.
"나도 좋아요"
사돈도 저를 끌어안고 펌프질을 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애들 몰래 자주 만납시다"
하시기에
"조심하세요, 애들 눈치 안 채게"
하자
"그래 야죠"
하시고 웃으시더니 키스를 하시며 펌프질의 속도를 올렸습니다.
이제 딸이 결혼을 하자 저는 여자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잊었던 감흥은 다시금 저를 찾아와 저를 미치게 만들었습니다. 십 수년만에 제가 여자라는 것을 다시금 알았습니다. 더구나 다행이 생리도 있었기에 보지에서 물도 나왔고 또 임신의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생각하였습니다.
2~3일 후면 생리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저는 아심하고 받아들일 사돈의 좆 물이 기다려졌습니다. 십 수년동안 단 한번도 안 들어왔던 남자의 뜨거운 좆 물이...... 좋았습니다.
우람하고 단단한 마치 나무 막대기 같은 사돈의 좆이...... 제 보지 안에서 놀고있는 사돈의 좆은 마치 야구방망이 같은 느낌으로 제 보지를 찔렀습니다. 아니 야구방망이가 아니라 쇠 절구통의 절구 같이 단단하였습니다.
사돈도 노래방에서 입으로 한번 싼 뒤인지라 쉽게 제 보지 안에 좆 물을 뿌리지는 못하고 땀을 흘리며 펌프질을 하시기에 머리맡에 있던 수건으로 이마와 얼굴을 닦아드렸습니다.
"힘드시죠?"
하고 묻자
"안 하다 하니 힘들어요"
하며 웃었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아~~~올라요 또 올라요"
하며 소리쳤습니다.
"나도 나오려고 해요"
하시기에
"그럼 같이 해요"
하자 빠르게 펌프질을 하시더니 내 몸 위에 쓰러짐과 동시에 제 보지 안으로는 십 수년만에 처음으로 남자의 좆 물이 그도 딸의 시아버지 좆 물이 힘차게 제 자궁을 때렸습니다.
"아~뜨거운 것이 들어와요"
하고 소리치며 도리질을 쳤습니다. 사돈은 엉덩이에 더 힘을 주어 더 깊숙이 좆을 박고 좆 물을 뿌려주시자 저도 사돈의 엉덩이를 힘껏 당겼습니다.
"사부인 좋았어요?"
사돈이 순을 헐떡이며 물으시기에
"죽는 줄 알았어요"
하며 웃자
"나도 아주 좋았어요"
하며 따라 웃었습니다.
"사부인 이름이 무엇인징ㅅ?"
"아 네 제이름은 정옥분이에요"
"옥분이라..아주 예쁜이름이네..한번 불러보고 싶어 옥분아..""
"네 사돈어른,,"
"옥분아 이제 우리 둘이 있을 때는 사돈이 아니고 부부처럼지내자고,,내이름 이상우야"
"아 그래도 어떻게.."
"옥분아 넌 이제 내 마누라야 너도 날 고방님이라고 불러봐"
"어 그래도,,,,할수 없네요 서방님"
"오 그래야 옥분아"
"네 서방님"
"이제 옥분이 네 보지는 내 보지가 되었으니 자주 만나서 즐겨보자"
"네 서방님 전 서방님만 믿고 다를게요"
"그래야 잘 생각했다 여보 마누라"
"네 서방님 말슴하세요"
"오늘 옥분이는 나하고 결혼한날이다 매년 결혼 기념일을 축하하자"
"네 좋아요 서방님"
그렇게 사돈께서는 부부로 살기로 약속하시고 제 보지에 흠뻑 좆 물을 뿌려주시고는 저와 함께 다정하게 샤워를 하고 나오시더니 제 휴대폰 번호를 물으시기에 없다고 하자 자기 이름으로 한 대 사 주시며 요금 걱정 말라고 당부하시고는 애들에게 들키지 말라하시며 진동으로 하여주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었던 일이 벌어저서 사돈과 부부가 되었으니 엄마는 시아버지에게 시집가고 딸은 아들에게 시집가는 겹사돈이 되어 버렸다
이 것이 딸아이의 시아버지인 사돈과의 첫 섹 스였는데 그 후로 사돈께서는 틈만 나시면 저를 불러 그 스틱처럼 단단한 좆으로 제 보지를 즐겁게 하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미치게 만들어주십니다. 얼마나 정성스럽게 저를 보살펴주시고 사랑해 주시는지 감동이 될 뿐이었읍니다
수 십 년 만에 다시 찾은 다시 찾은 이 행복이 꿈이 아니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사돈을 서방님으로 온정성을 다하여 모시기로 결심 또 결심하였읍니다

Tuesday, August 19, 2014

worth pictures


같은 쪽의 팔과 다리를 잃은 사이클 선수

23시간의 심장 수술을 수행 한 후
의사와 간호사,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세계대전 전쟁 중 기도하는 러시아 군인

건물붕괴 사고현장에서 발견된 
자신의 여인을 지키려했던 한 남성 
(방글라데시 봉제공장 사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북극곰

산불이 일어난 호주에서 
코알라에게 마실 물을 주는 소방관

산사태로 사망한 소녀(주인)의
무덤을 떠나지 않는 반려견

이라크전에서 아버지를 잃은 8살 아들

아버지는 아들을 기억한다.
(9/11 테러 10주년 추모행사)

미군에게 차 한 잔을 건네는
아프가니스탄 노인

음악을 통해 인종차별, 폭력 그리고 빈곤을
극복할수 있도록 도와준 선생님(故이태석 신부)의
장례식에서 한 소년의 바이올린 연주

이라크 전쟁파병으로
7개월만에 다시 만난 모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캐나다 병사,
Jack Bernard와 그의 아들과 부인

폭탄테러를 막고 죽은 경찰견

행복

흑인과 백인이기 전, 사람과 사람

전쟁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한 남편

아우슈비츠 가스학살이 행해진 방 벽면

6.25 전쟁으로 인한 반세기의 단절,
그리고 다시, 기약없는 이별

사위에게 딸을 넘겨준 뒤,
아버지의 뒷 모습

교육 문제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하면서, 울지 않으려고요…."

19일 오후 동구마케팅고등학교 안종훈(42) 교사가 학교 정문 앞에 섰다. 그는 지난 16년 간 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청춘을 바친 곳이다. 그는 개학을 이틀 앞둔 18일 파면 통지서를 받았다. 안 교사가 담임을 맡고 있는 3학년 7반 학생들은 그가 학교에서 쫓겨난 사실을 아직 모른다. 

안종훈 교사는 "진학지도가 필요한 아이들인데, 졸업을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전했다. 그는 20일 학교에서 학생들과 작별인사를 나누려 하지만, 학교가 그를 교내에 들여보낼지 알 수 없다. 안 교사는 학생들에게 띄울 작별인사를 쓰고 있다. "계속 썼다, 지웠다 한다…"고 말을 흐렸다.

동구마케팅고를 운영하는 재단인 동구학원이 안 교사를 파면한 이유는 '안 교사가 2012년부터 현재까지 학생교육과 학생업무 등에 불성실했다'는 것이다. 학생 등교지도 불이행 등 7가지 항목이다. 동구학원은 단 7일 만에 두 차례 징계위원회를 열어 안 교사의 파면을 결정했다. 속전속결이었다. 안 교사는 "봉건왕조도 아니고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이렇게 쉽게 한 가정의 생계를 박탈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동구학원은 징계 이유에서 왜 2012년을 적시했을까. 그해 9월 서울시교육청은 동구학원에 대한 특별감사에 나섰다. 뇌물을 받고 학교 공금을 빼돌리는 비리를 저질러 실형을 선고받은 이아무개 행정실장이 여전히 학교를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동구학원은 행정실장을 퇴직시키지 않았고, 서울시교육청은 조웅 이사장의 임원 승인을 취소했다. 

이 모든 것은 안종훈 교사의 공익제보에서 비롯됐다. 학교는 공익제보자 색출에 나섰고, 결국 안 교사의 이름을 공개했다. 그는 당시 학교 구성원들로부터 큰 질타를 받았다. 학교는 지난 6월 성과급 지급 대상자에서 안 교사의 이름을 뺐고, 8월부터 징계절차에 밟았다. 안 교사에 대한 징계는 공익제보에 대한 보복 징계였던 셈이다.

안 교사 파면은 교육계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공익제보자 보호와 사학 비리 척결을 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된 조희연 교육감은 19일 서울시교육청 감사관실에 동구마케팅고가 안 교사에게 내린 징계에 대해 특별감사를 지시했다. 안 교사가 속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교육단체들도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고 있다.

안 교사는 파면의 본질이 사학 비리와 공익제보자 탄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학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데, 모든 권한은 사학 이사장이 누리고 있다"면서 "저에 대한 파면이 취소되지 않으면, 사학은 '비리를 저지르고 공익제보자를 잘라도 버티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진보교육감 시대가 열렸지만, 시도교육감이 사학을 견제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면서 "사학 비리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심이 커지고 사학을 견제하는 법과 제도가 마련된다면, 저는 파면 탓에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제가 한 일에 보람을 느낄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공익제보, 내부고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바뀌는 계기도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안 교사 인터뷰는 19일 오후 동구마케팅고 인근 카페와 학교 정문 앞에서 진행됐다. 다음은 기자와 안 교사의 일문일답을 정리한 것이다.

"아이들의 졸업을 지켜보지 못해 가슴이 아프다"

-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19일 감사관실에 동구마케팅고가 안 교사에게 내린 징계에 대해 특별감사를 지시했다. 앞서 18일에는 블로그에 "특별감사를 통해 이 사학 재단의 행위가 정당한지 가려보려고 한다"고 했다.
- 18일 파면 통지서를 받았다. 동구학원으로부터 징계 소식을 들은 것은 언제였나?
"지난 4일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으로 가던 중 동구학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8일 징계위원회에 참석하라는 내용이었다. 징계 사유는 문자메시지와 카카오톡으로 받았다. 제가 2012년부터 현재까지 학생교육과 학교업무 등에 불성실했다는 이유였다. 학생 등교지도 불이행 등 7가지 항목을 적시했다. 어처구니없는 징계 사유였다."

- 징계위원회에 참석했나. 
"참석하지 않았다. 동구학원은 11일 2차 징계위원회를 열겠다고 했다. 연기원을 제출하면서 징계 사유를 구체적으로 알려달라고 했더니, '본인이 잘 알고 있는 내용'이라는 답이 왔다. 14일 징계위원회에 참석해 소명했다. 그 뒤 징계위원들은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위한 질문을 하지 않은 채, '나가라'고 했다. 징계위원 기피 신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 동구학원은 14일 징계위원회에서 파면 결정을 내렸다.
"18일 우편으로 징계 결과를 받았다. 너무나도 비민주적인 결정이었다. 봉건왕조도 아니고 이렇게 쉽게 한 가정의 생계를 박탈할 수 있나. 16년 동안 청춘을 바쳐 일한 학교에서 이렇게 허망하게 쫓겨난다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허탈했다. 그래도 학교로 반드시 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을 담담하게 먹을 수 있었다."

- 20일로 예정된 2학기 개학을 이틀 앞두고 파면 통보를 받았다.
"아이들의 담임선생님으로 끝까지 남고 싶었다. 아이들의 졸업을 지켜보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 취업을 준비를 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미안하다. 20일 아이들과 작별인사를 하려고 하는데, 학교에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들에게 갑작스럽게 쫓겨난다는 이유를 하면, 아이들이 충격을 받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띄울 작별인사를 쓰고 있는데, 계속 썼다 지웠다 한다…."

공익제보의 결과는 파면

- 동구학원이 파면을 결정한 근본적인 이유는 안 교사가 동구마케팅고의 비리를 서울시교육청에 알렸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달라.
"동구마케팅고 이아무개 행정실장은 2010년 9월 업무상 횡령과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됐다. 학교 시설 공사업자로부터 19회에 걸쳐 5400만 원의 금품을 받고, 교비를 포함해 공금 2700만 원을 빼돌렸다. 이 행정실장은 2011년 11월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추징금 5400만 원을 선고받았다. 당시 학교에는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행정실장이 돈 문제로 구속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2012년 4월 서울시교육청에 학교가 행정실장에게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를 묻는 민원을 넣었다."

- 당시의 민원은 동구마케팅고 감사로 바로 이어지지 않았다.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저보고 제보의 근거를 가져오라고 하더라. 교육청에 대한 불신이 컸다. 당시 곽노현 교육감은 사후매수 혐의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라, 교육청에는 곽 교육감의 영이 서지 않았다. 다행히 현재 서울시감사관인 송병춘 당시 서울시교육청 감사관의 감사 의지가 컸고, 결국 서울시교육청은 2012년 9월 동구학원에 대한 특별감사에 돌입했다. 실형을 받은 행정실장의 당연퇴직을 이행하지 않은 점 등 17건의 비위사실이 적발됐고, 12명에 대한 징계처분이 내려졌다."

- 동구학원은 교육청 감사가 시작되자, 누가 민원을 넣었는지 색출에 나섰다.
"동구학원은 제 민원으로 교육청의 특별감사가 시작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동구학원은 민원인에 대한 자료를 공개하겠다면서 학교구성원으로부터 동의서를 받았다. 당시 저와 함께 5명의 동료교사가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결국 동구학원은 지난해 3월 제가 민원인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학교구성원로부터 학교를 분란에 빠뜨렸다는 질타를 받았다."

- 하지만 오히려 조웅 동구학원 이사장의 임원 승인이 취소됐다.
"조웅 이사장은 행정실장을 퇴직시켜야 했지만, 감봉 3개월의 솜방망이 처벌만 했다. 교육청은 행정실장 급여 지급을 중단하고 그의 퇴직을 요구했지만, 조웅 이사장은 무시했다. 조 이사장은 오히려 정관에서 당연퇴직 조항을 삭제하기도 했다. 결국 사학과 관계가 깊은 문용린 교육감은 2013년 6월 조웅 이사장의 임원 승인을 취소했다. 조 이사장이 소송을 냈지만, 2014년 1월 서울행정법원은 서울시교육청 손을 들어줬다."

- 8월 갑작스럽게 징계가 내려진 이유는 무엇인가.
"학교는 이미 지난 6월 저만 성과급 지급 대상자에서 뺐다. 교사에 대한 차등성과급을 균등 분배로 무력화하는 운동을 한 바 이다. 동구학원은 이를 트집 잡아 제가 성과급을 부당 수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어떠한 근거로 대놓지 않았다. 그때부터 징계를 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공익 제보, 내부 고발에 대한 인식 바뀌는 계기 되길"

"조희연 교육감이 징계 과정에서 동구마케팅고에 신중하게 징계를 결정하라고 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 조 교육감은 저에 대한 징계를 공익제보자에 대한 보복징계라고 인식하고 있다. 조 교육감은 6·4 지방선거에서 공익제보자 보호와 사학비리 척결을 공약을 내걸었다. 제 파면은 조 교육감의 두 공약과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조 교육감이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

- 결국 동구마케팅고는 조 교육감의 말을 무시하고 막무가내 징계를 내린 셈인데.
"동구학원은 '교육청이 사학에 어떻게 할 수 있겠어', '교육청의 시정 요구에도 버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조웅 이사장은 자리에서 물러나도, 학교를 좌지우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겠나. 학교 구성원을 향해 공익제보를 하면 본때를 보여주겠다는 메시지를 보낸 효과도 감안했을 것이다."

- 사학 비리 문제가 다시 확산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비리를 지지른 행정실장이 버젓이 학교를 다니고 있다. 사학 비리가 어디까지 진화하는 보여줬다. 사학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지만, 모든 권한은 사학 이사장이 누리고 있다. 건어물 가게를 고양이에게 맡겨놓은 것이다. 제 파면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사학은 비리를 저질러도 동구마케팅고처럼 버티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다."

- 사학을 견제할 수 있는 법과 제도 마련에 대한 논의가 이어지지 않을까. 
"진보교육감 시대를 맞이했지만, 시도교육청이 사학을 견제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다. 사학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와 법 마련이 시급하다. 우리 사회가 사학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법과 제도가 마련된다면, 파면은 개인적으로는 힘들고 고통스럽겠지만 제가 한 일에 대한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공익제보자 탄압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커지고 있다.
"제 파면의 본질은 공익제보자에 대한 부당한 탄압이다. 앞으로 누가 내부 문제에 대해 공익제보를 하겠나. 윤 일병 사망사고나 세월호 침몰 사고 역시 누군가 미리 목소리를 냈다면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누군가 미리 목소리를 냈더라도 '시끄럽게 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법적 대응을 준비하고 있다. 공익제보, 내부고발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