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June 11, 2014

구글신화!



 인터넷 웹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래리 페이지는 인터넷 웹을 주제로 논문을 준비하게 된다. 웹의 구조를 연구하던 그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불현듯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인터넷에 존재하는 모든 웹을 다운로드해서 각 웹페이지간의 연결 구조, 즉 링크를 분석해 보기로 결심한다. 래리 페이지가 작업에 들어가자 세르게이 브린 역시 깊은 관심을 보이고 기꺼이 동참했다. 래리 페이지는 인터넷 웹상에서 링크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공간에서 링크가 많이 된 웹 페이지는 그만큼 가치가 있음을 뜻하였다.
하나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다른 사이트의 주소를 링크해 주는 것은 일종의 투표와 같았다. 워낙 학자 집안에서 자란 데다 박사 과정을 밟는 대학원생인 터라 논문을 중요하게 여기던 래리 페이지에게 링크는 논문으로 치면 인용과 비슷했다. 훌륭한 논문일수록 다른 논문에서 참고문헌으로 인용될 확률이 높다. 래리 페이지는 인터넷상에서 링크된 횟수를 통해서 각 웹페이지간의 랭킹을 정하는 작업을 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웹페이지의 순위를 매길 때 한 가지 아이디어를 더했다.
만약 논문이 권위 있는 학술지에서 언급되면 그만큼 더욱 가치 있는 논문일 가능성이 있는 것처럼 단순히 링크의 횟수뿐만 아니라 링크를 건 웹사이트의 명성에 가중치를 더하였다. 이를테면 「뉴욕타임스」처럼 권위 있는 언론사의 사이트에서 링크를 한 웹페이지라면 일반 블로그에서 인용한 링크보다는 더 높은 순위에 올라갈 수 있는 공식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랭킹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이었다. 사실 이 작업은 래리 페이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어렵고 무모한 일이었지만 세르게이 브린의 천재적 수학 실력 덕분에 어려운 난제들을 차근차근 풀어갈 수 있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래리 페이지는 웹페이지의 순위를 정하는 알고리즘을 검색에 접목해 보고자 하였다. 검색어를 입력하면 검색어와 관련한 웹페이지의 순위를 나열해 주는 검색엔진을 완성하자 검색어와는 관련성도 떨어지고 중요하지 않은 웹페이지를 잔뜩 보여주는 기존의 검색엔진보다 훨씬 뛰어난 검색 결과를 보여주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자신들의 검색엔진을 백럽이라고 불렀으나 나중에 구글로 바꾸었다. 구글은 원래 해안가의 모래 숫자나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의 숫자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큰 수를 뜻하는 구골(Googol)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연구실 동료였던 숀 앤더슨(Sean Anderson)이 회사 이름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리던 중 스펠링을 ‘Google’로 잘못 적으면서 구글이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구글 검색엔진이 서비스를 시작한 곳은 스탠퍼드 대학교의 서버였다. 그래서 구글의 첫 번째 인터넷 주소는 ‘google.stanford.edu’였다. 구글은 기존의 검색엔진보다 탁월했기 때문에 스탠퍼드 대학교 내에서 인기가 좋았다. 점차 늘어나는 사용자들의 검색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데이터를 저장하고 관리하는 컴퓨터가 더 필요했다. 그러나 학생 신분이었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지도교수의 도움을 받아 학교자금에서 1만 달러를 지원받았지만 구글을 제대로 서비스하기에는 컴퓨터가 부족했다. 결국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컴퓨터 부품을 찾아 다녔다. 그들은 잡동사니 부품들을 모아서 컴퓨터를 만들었는데, 이때 효율적으로 시스템을 구축하는 노하우를 쌓게 된다. 당시만 해도 인터넷을 서비스하기 위해서는 대형 서버 컴퓨터가 필요했다. 하지만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저가의 개인용 컴퓨터를 병렬적으로 연결해서 서버 시스템을 구축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비록 돈이 부족해서 고육지책으로 생각해 낸 방법이었지만, 최소의 비용으로 컴퓨터를 만들고 이를 하나의 유기적인 시스템으로 연결시키는 능력은 오늘날 구글 성공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주변의 컴퓨터 부품을 최대한 활용해서 컴퓨터를 구축해도 항상 장비가 부족했던 둘은 스탠퍼드 대학교에 새로 컴퓨터가 배달될 때 이를 몰래 가져다 쓰는 대담한 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컴퓨터 장비들은 래리 페이지의 기숙사 방에 설치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은 컴퓨터로 가득 찼다. 그래서 검색엔진을 다듬는 실제 작업은 세르게이 브린의 방에서 이루어졌다. 인터넷 웹페이지를 방문해서 데이터를 모아오는 작업은 네트워크에도 부담이 되는 문제였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 인터넷에서 데이터를 긁어 올 때마다 스탠퍼드 대학교의 네트워크는 종종 과부하에 걸렸고 스탠퍼드 대학교 전체 인터넷망이 다운되는 적도 있었다. 다행히 벤처기업의 요람인 스탠퍼드 대학교답게 초창기에는 이를 관대하게 넘어가 주었다.
관성의 법칙을 비웃고 스스로 돌파하다
구글 서비스가 나날이 인기를 끌게 되자 래리 페이지는 이를 사업으로 발전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박사 과정을 그만둘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인터넷 포털 업체에 구글을 백만 달러에 팔 생각이었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당시 검색 점유율 50%가 넘었던 알타비스타를 시작으로 야후, 익사이트, 인포시크 등 당시 내로라하는 각종 포털 업체들을 찾아가서 구글을 시연해 보였다. 하지만 당장 꺼지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로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계속해서 기업들에게 거절을 당하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좌절감을 느꼈다. 너무 화가 났지만 포기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둘은 결국 학교를 떠나서 직접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다. 현재 승승장구하는 구글의 창업이 사실은 아무도 그들의 검색엔진을 구입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면 시대를 앞선 선구자들의 비애가 느껴진다.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은 검색엔진이 인터넷 시대에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봤지만, 정작 포털 업체들은 검색이란 수많은 인터넷 서비스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구색을 맞추는 차원에서 검색 서비스를 제공할 뿐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기에 구글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의 고정관념으로 현실을 보는 사람은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래서 새로운 미래를 창조하려는 사람들은 고정관념으로 가득찬 사람에게 인정 받기가 힘들다. 70년대 중반 스티브 잡스가 개인용 컴퓨터가 모든 가정과 학교에 보급될 것이라면서 애플2 컴퓨터로 사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를 미치광이 취급하였듯이 말이다. 그런데 IT라는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 된 인물들은 한결같이 구글의 창업자들이나 스티브 잡스처럼 비웃음과 조롱을 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빌 게이츠가 처음 소프트웨어만 판매하겠다고 나섰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70년대만 해도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를 사면 당연히 따라오는 보너스 정도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소프트웨어에 대한 지적재산권이 명확하지 않았고, 소프트웨어 복제 또한 아무렇지 않게 이루어지던 시대였다. 빌 게이츠가 개발한 베이식 역시 복제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에 분노한 빌 게이츠는 불법 복제는 절도 행위라면서 이를 자제할 것을 촉구하는 공개 편지를 작성한다. 그러나 이를 읽은 독자들은 오히려 빌 게이츠를 비난하였다. 그의 비전은 분명 시대를 앞선 선구자적인 생각이었지만 지적재산권이 희박하던 당시에 소프트웨어만으로 수익을 내겠다는 그의 발상은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었다.
모든 물체에는 자신의 운동 상태를 유지하려는 뉴턴의 제1법칙, 즉 관성의 법칙이 적용된다. 인간 역시 관성의 법칙처럼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려는 보수적 동물이다. 그래서 보수적인 동물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강력한 외부의 자극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선지자들은 외부의 자극 없이 스스로 변했으며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그만큼 많은 열정을 쏟아부었다. 사실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 그 자체가 어려운 일이지만, 창조를 실현하는 과정에서 각종 암초를 만나기 마련이다. 결국 성공의 이름으로 우리가 기억하는 IT 시대 승자들은 그들이 부딪힌 암초들을 강력한 자기 확신과 의지로 이겨 낸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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