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ugust 13, 2014

윤 일병 군대 폭행


‘윤 일병 사건’ 수사 기록 단독 입수

원래부터 ‘악마’들은 아니었다. 입대 전에는 여느 20대처럼 아르바이트를 했고, 군에서 살을 빼 여자친구를 사귀고 싶어하는 평범한 청년들이었다. 간호사, 물리치료사, 방사선사를 꿈꿨던 의무반 병사들은 어떻게 전우를 무참하게 때려 숨지게 했을까. <한겨레>는 1248쪽에 이르는 육군 28사단 윤아무개(21) 일병 사망사건 수사기록과 자필진술서, 병영생활 기록부, 면담일지를 단독 입수해 이들이 폭력에 물들어가는 과정을 들여다봤다.
나이들어 늦게 입대한 이병장어린 선임병에 폭언 겪다 전출 겉으론 ‘모범병’ 뒤로는 폭력병사들, 떠밀려 또 스스로 때려 “개처럼 행동하라, 그게 사는길”의무반 최고참으로 폭행을 주도한 이아무개(26) 병장도 이병 시절 선임병들한테서 ‘갈굼’(괴롭힘)을 당하다 결국 부대까지 옮겼다. 이 병장은 훈련소를 거쳐 2012년 11월 △△△대대에 배치됐다. 그러나 한달여 만에 지금의 ○○○대대로 전출된다. 선임병들의 폭언을 간부들에게 알렸다가 이 사실이 부대에 알려져 ‘배신자’로 낙인찍혔기 때문이다.
당시 이 병장은 훈련 중 넘어져 손가락을 다쳤는데도 고통을 견디며 제설작업을 했다. 이 사실을 모른 선임병이 “나이 처먹고 그것밖에 못하느냐”, “군대가 만만하냐”며 욕을 했다. 이튿날 손가락 골절 진단을 받았다. 그런 이 병장에게 선임병은 “왜 아픈 걸 말 안 했느냐”고 또 혼을 냈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입대한 이 병장은 “나이 어린 선임병들한테서 폭언을 듣자 수치심에 잠을 잘 자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다”고 했다.
‘이등병 선진 병영캠프’에 들어간 이 병장은 ‘비밀이 보장된다’는 말에 이런 부대 분위기를 설문지에 적어 냈다. 그러나 비밀은 보장되지 않았다. ‘소원수리를 했다’는 사실이 선임병들 사이에 알려지며 “배신자”가 됐다. 이 병장은 전출을 적극 희망했고, 2012년 12월 ○○○대대로 배치됐다. 부대를 옮긴 이 병장에게 폭언과 욕설은 없었다. 지난해 6월에는 ‘모범운전병’으로 대대장 표창을 받았다. 12월에는 근무유공 대대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윤아무개(21) 일병은 지난해 12월 입대했다. 대학에서 간호학과를 다니던 윤 일병은 의무병으로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유격훈련이 두렵긴 했지만 “멋진 사나이가 되겠다”는 꿈을 꿨다. 올해 2월18일 본부포대장은 윤 일병과 면담 뒤 “침착하고 차분히 자신의 생각을 잘 전달했다”고 기록했다.
윤 일병이 자대배치를 받고 만난 선임병들도 출신은 대부분 윤 일병과 비슷했다. 대학을 휴학하고 입대한 평범한 20대들이었다.
이 병장도 대학 문화콘텐츠학과에서 3학기를 마쳤다. 장남인 이 병장은 휴학 뒤 이모부가 운영하는 세탁기 부품회사에서 영업직 운전기사로 3년간 일했다. 신병교육 시절 주임원사의 면담기록을 보면, 그는 입대 전에 4000만원을 모을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다.
이 병장의 ‘병영생활 지도기록부’를 보면, 그는 늦은 나이에 입대하는 아들을 염려하는 어머니를 오히려 걱정한다. 홀로 교습소를 운영하는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아들이었다. “나이는 조금 있으시지만 경력이 많으셔서 ‘올백점’도 배출했다”며 자랑도 했다.
이 병장은 입대 당시 사귄 지 2년이 넘는 1살 연상의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는 훈련소에서 쓴 글에서 “예쁘고 착하고 나에게 잘해주는 ○○ 보고 싶다. 지금 당장 전화통화를 할 수 없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고 쓰고 ‘하트’ 모양을 그렸다. 그러면서 “집에 연락이 갈 만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매사에 조심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를 면담한 주임원사는 “나이도 25살이고 사회생활도 이상 없이 잘했기 때문에 무난하게 군생활을 할 것으로 판단된다”고 했다.
의무분대장인 하아무개(22) 병장은 이 병장의 한달 후임이다. 4살 많은 이 병장을 ‘형’이라 불렀다. 간호학과에 다니다 입대한 하 병장은 기타 치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가 바란 군대는 “나를 좀더 성숙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이아무개(21) 상병은 대학 방사선과를 휴학하고 군에 왔다. 가장 싫어하는 사람으로 “남을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 사람”을 꼽았다. 병영생활 기록부에 “저도 당해봐서 당하는 사람의 마음을 잘 압니다. 당하는 사람은 밖을 나가는 것조차 무서워합니다”라고 썼다.
지아무개(21) 상병은 기계기능사를 꿈꾸던 학생이었다. 몸무게가 90㎏이 넘는 지 상병은 “군에서 살을 빼고 몸을 만들어 제대 뒤 여자친구를 사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윤 일병의 석달 고참인 이아무개(21) 일병과 의무지원관인 유아무개(23) 하사는 물리치료과에 다니다 입대했다.
선임병들의 잦은 ‘집합’과 폭언이 싫던 이병에서, 후임병은 물론 나이 어린 하사까지 ‘장악’한 최고참 병장이 된 이 병장은 어느덧 군대 폭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이 병장은 윤 일병이 오기 전인 지난해 12월까지는 주로 이 일병을 때렸다. 이 일병은 군검찰 조사에서 “지난해 12월 말 암기시험에서 많이 틀리자 이 병장이 치약을 짜서 먹였다. 목소리가 작고 대답을 못한다는 이유로 침상에 눕게 한 뒤 생수통에 물을 가득 받아서 얼굴에 부었다”고 진술했다.
이 병장은 ‘일병 관리’를 못한다는 이유로 다른 병사들도 때렸다. 지난 1월 이 병장은 지 상병의 머리를 방탄헬멧으로 내려쳤다. 2월 초 지 상병은 동기에게 “이 일병이 실수하면 이 병장이 나까지 불러 꾸중한다. 너희 분과에도 ‘맏후임’이 잘못하면 위 선임이 많이 혼나느냐”고 묻기도 했다. 이에 동기가 “힘들어하지 말고 ‘마음의 편지’(소원수리)를 작성하라”고 충고했지만, 지 상병은 “됐다”고 했다.


엄마걱정 효자…기타·노래 취미
간호사·방사선사 꿈 키우던 이들
입대땐 “신념 키우고 한계 돌파”
자대배치 이래도 욕, 저래도 질책
진급 거치며 폭력 행사에 무신경
집단괴롭힘 신병에 집중 악순환
자기보다 나이 많은 병장을 ‘관리’해야 하는 유 하사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이 병장한테서 폭행 사실을 ‘보고’받기도 했다. 지 상병은 조사에서 “이 병장이 이 일병을 때릴 때부터 지원관(유 하사)에게 하나하나 다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지난 1월 이 병장을 ‘면담’한 유 하사는 “이 병장은 성실하고 의무대 후임들에게 모범적인 선임으로 인정받고 있음. 후임들이 실수한 부분, 잘못한 부분은 고쳐나가 주며 잘한 부분은 칭찬을 해주어 의무대 분위기를 이끌어 나가고 있음”이라고 기록했다. ‘잘못한 부분을 고쳐주는’ 방식은 구타와 가혹행위였다.
한 병사는 윤 일병이 맞는 걸 본 유 하사가 “나도 때리고 싶은데 쥐콩만해서 때리지 못하겠다. 나는 때리는 거 신경 안 쓴다. 맞으면서 배워야 된다”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유 하사는 윤 일병이 숨지기 사흘 전인 4월4일 저녁 윤 일병에게 방탄헬멧을 씌우고는 전기스탠드를 집어 내리쳤다. 이 병장한테서 “윤 일병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말을 들은 후 그랬다. 전기스탠드 목이 부러지고 형광등이 깨졌다. 이 병장은 유 하사의 묵인과 동조 아래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폭군’이 돼갔다. 그는 이 상병과 하 병장에게는 “나의 좌뇌와 우뇌”라고 했다.
그렇게 폭력을 싫어했던 병사들은 어느덧 폭력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갔다. 처음엔 시켜서 때렸지만,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 병장은 헌병대 조사에서 “(윤 일병을) 관리하라고 하면 하 병장, 이 상병, 지 상병이 윤 일병을 때렸다”고 했다. ‘관리 지시’를 받고 폭력을 행사한 가해자들은 ‘이 병장이 시켜서 때렸다’고 진술했다. 결국 의무반에서 폭력은 일상과 같은 말이 됐다. 윤 일병이 맞다가 의식을 잃고 다시 일어나지 못한 4월6일에도 그랬다. 이 병장은 이 일병에게 욕설을 하고 있었다. 하 병장은 앉아서 컴퓨터를 하고 있었고, 이 상병은 입실 환자에게 파스를 붙여주고 있었다. 지 상병은 관물대에 앉아 있었고, 윤 일병 뒤에는 이 일병이 서 있었다.
이날 오전 9시 윤 일병이 빈 페트병을 떨어뜨리자 이 상병이 윤 일병에게 욕을 했다. 이를 본 이 병장은 하 병장에게 “너도 좀 뭐라고 해라. 지켜만 보지 말고”라고 말했다. 오후 4시25분, 이 병장은 지 상병에게 “너는 이제 내 칼자루(왼팔)다.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말을 하면 나 대신 윤 일병을 때려라”라고 지시했다. 이 병장의 지시를 받은 지 상병은 엎드려뻗친 자세의 윤 일병 가슴과 배를 10여차례 발로 걷어찼다. 병원으로 실려간 윤 일병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진 4월7일 오전 이들은 혹시라도 꼬리가 잡힐까 두려워 윤 일병의 관물대에서 수첩을 찾아 찢어버렸다.
윤 일병은 철저히 고립돼 있었다. 종교행사에 참석하거나 가족을 만나는 것도 이 병장 허락을 받아야 했다. 교회 문제로 시끄러운 가족사를 가진 이 병장은 “(윤 일병이) 교회에 가는 것은 괜찮은데 내 눈에 띄게 하지 말라”고 상병들에게 지시했다. 가족 면회도 막았다고 한다. 윤 일병이 맞아서 다리를 절었기 때문이다. 이 병장은 윤 일병에게 “계속 잘못하면 카드를 쓰겠다”고 하고는 봉급이 들어오는 나라사랑카드를 뺏기도 했다.
이 일병은 ‘윤 일병 폭행 사실을 왜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헌병대 수사관의 질문에 “보고하면 관심병사가 된다는 말을 들어서”라고 했다. 윤 일병이 숨진 다음날 이 일병은 진술서에 이렇게 썼다. “하루하루가 냉동고에 있는 듯 경직된 분위기에서 윤 일병이 이 병장에게 얻어맞고만 있었습니다. 윤 일병에게 내가 혼났던 일을 말해주면서 ‘이 문제를 바꿀 수 있는 것은 너’라고 말했습니다. 윤 일병이 변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았고, ‘맏후임 관리를 못한다’며 나도 맞을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윤 일병을 때린 건 딱 두번입니다. 이 병장이 때린 것처럼 저도 윤 일병의 가슴을 때리고 혼냈습니다. (윤 일병이 폭행으로 쓰러지기 전날에는) ‘내가 했듯이 개처럼 행동하라. 그래야 네가 살 수 있다’고 말해줬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