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ly 7, 2016

군대 총기사건

1. '530GP 총기난사 사건'

2005년 6월 19일 경기 연천군에 자리한 육군 제28보병사단 530 GP에서 김일병이 내무실에 수류탄을 던지고 총기를 난사해 8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당한 사건으로 이른바 '김일병 사건'이라고도 한다.

최초 사건 발생 당시 북한군의 공격으로 상황이 전파되기도 했다. 부대원 중 '인성평가점수'가 가장 높았던 김일병이 사건을 저지른 이유는 '병영부조리'인 것으로 밝혀져 군의 병영실태가 지적되기도 했다.

사단장, 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이 전부 옷을 벗은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병영 문화를 완전히 뒤바꿔 놓기도 했다.

2. '조준희 일병 총기난사 및 월북사건'

1984년 6월 26일 오전 10~11시 강원 고성군에 자리한 제22보병사단의 522GP에서 벌어진 일병의 총기난사 사건이자 월북사건.

사건 직후에는 북한의 급습으로 판단했지만, 해당 GP 소속 상황병인 조준희 일병이 내무반에 수류탄을 투척하고 M-16 총기를 난사한 뒤 철책을 넘어 월북한 것이었다.

이 사고로 내무반에서 당시 자고 있던 병사들이 파편과 총탄에 맞아 숨지거나 다쳤으며, 조 일병을 뒤쫓던 13명의 수색대원이 발목 지뢰를 밟거나 신병의 오발사고로 현장에서 사망하기도 했다.

해당 사건으로 인한 사망자는 15명, 부상자가 11명이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 국군 창설 이래 역대 최악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3. '제28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1985년 2월 24일 제28보병사단 직할부대 화학지원대에서 벌어진 총기난사 사건으로 8명의 사망자와 4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가해자인 박 이병은 도주했지만, 얼마 안 가 자수했다. 전두환 정권 당시 일어난 일인지라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고 해당 부대의 지휘관들은 모두 보직 해임 처분을 받았다.

박 이병이 비록 병영 부조리와 가혹 행위로 인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끝내 1986년 사형이 집행됐다.

20년 가까이 은폐되던 이 사건은 2005년 530GP 사건이 발생한 뒤 밝혀졌다. 더군다나 당시 정부는 현장검증 등의 조사만 끝내고 바로 정리하면서 사건을 축소·은폐·조작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4. '제2해병사단 총기난사 사건'


2011년 7월 4일 인천 강화군 소재 대한민국 해병대 제2해병사단에서 일어난 역대 최악의 해병대 사고.

전역을 9개월 앞둔 김모 상병이 사건을 일으키기 전 소주 1병을 마신 뒤 부대를 뒤집어 놓았다. 이로 인해 간부 1명과 병사 3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의 특이점은 후임이 선임을 쏜 것이 아니라 선임이 후임을 쐈다는 사실이다. 군의 조사 결과 후임이 선임을 대우하지 않는 '기수열외' 문화 때문으로 밝혀졌다.

또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선임 해병들은 무서워서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전입한 지 1달도 안 됐던 이병이 김 상병을 제지했다는 사실 때문에 해병대의 군 기강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5.'내곡동 예비군 총기난사 사건'

2015년 5월 13일 오전 10시 46분경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육군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제52향토보병사단 강동·송파 예비군 훈련자에서 있었던 총기사건이자 '묻지마 살인'이다.

동원훈련 영점사격 중 한 예비군이 뒤로 돌아서서 K2 소총으로 사격을 위패 엎드려 있던 다른 예비군들을 한발 한발 조준해 사격한 뒤 스스로 총을 쏴서 목숨을 끊었다.

불과 10초가량의 시간 동안 '정확히' 조준사격을 했으며 총알은 단 9발만 사용했다. 8발로 2명을 각각 사망시키고 중상을 입혔으며 나머지 1발은 자신의 머리를 쐈다.

군대를 전역하고서도 예비군 훈련에서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이 모든 예비군들에게 공포감을 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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