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8, 2014

마광수

1990년대 초반 세상을 시끄럽게 달군 이름들이 많지만 그중 하나로 ‘마광수’라는 이름 석 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인 그는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수필집을 내면서 화제의 주인공이 됐다. “보다 솔직하게 본능을 드러내는 사람,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을 천진난만하게 원시적인 정열을 가지고 가꿔 가는 사람이 ‘야한 사람’이다. 나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야한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행복한 삶을 누리기 위한 첫째가는 비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내용의 서문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최소한 비(B)급 태풍 이상의 충격으로 한국 사회를 강타한다. 기실 강의 중에 여학생들에게 “너희들 섹스해 봤어? 사랑하니까 섹스하는 거야. 섹스해 봐야 사랑을 알아!”라고 마르고 기다란 손가락을 뻗어 대던 교수란 별종일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하물며 그 생각이 책으로 나와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의 충격이란.
왜 난 서점에서만 그 책을 독파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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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광수 연세대 국문과 교수
‘사랑은 관능적 욕망 그 자체이며 인간의 행복은 성욕의 충족에서 온다’는 마광수 교수의 주장에 가장 발끈한 것은 여성계였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는 회지 <가정상담>을 통해 “야한 여자를 관능적 백치미의 여성으로 정의, 사고 능력이 모자랄수록 남성의 사랑을 받는다는 종속적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임신 등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혼전관계는 오럴섹스가 좋다”고 말한 마광수 교수에게 ‘마(魔)광수’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내가 다니던 학교에도 대자보가 나붙어 마광수 교수를 비난했는데 거기에는 마광수 교수의 이름을 ‘狂獸’라고 적고 있었다. ‘미친 짐승’이라는 것이었다. 비난은 좌우, 보수와 진보가 따로 없었다. 서울대학교 손봉호 교수는 “마광수 교수라고도 부를 것 없이 마광수씨라고 불러야 한다”고 일갈했고 소설가 이문열은 “구역질난다”고 내질러버렸으니 그야말로 ‘공공의 적’이었던 셈.
물론 그를 옹호하는 축의 목소리도 있었지만 비난의 쓰나미에 묻혀 버렸다. 그 증좌로는 나 자신을 들 수 있겠다. 고백건대 혹여 그 책을 읽는 모습을 보였다가는 변태로 낙인찍힐까 두려웠던 나는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와 후속작 <가자 장미여관으로>를 교보문고에서 몇 시간을 서서 독파했던 것이다. 그때 단상은 이랬다. “되게 솔직하긴 하네.” 하나 더 고백하자. 그러고 돌아온 학교에서 나는 후배들에게는 열심히 마광수 또라이론을 주창했다. 나는 매우 솔직하지 못했던 셈이다.
한 인터뷰에서 마광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대학생들은 너무나 빨리 순응해 버려 스스로의 본성에 정직하기 위한 투쟁 정신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때부터 삶은 재미없어지는 거다.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저항하고 반란하라고 가르친다. 어린아이처럼 솔직한 다양성과 자유를 위해.” 그의 ‘야함’에 대한 솔직한 토로 역시 그에게는 저항이었던 것일까. 군사독재라는 표현을 듣던 정부와 제도권, 그리고 그에 맞선다는 운동권조차 합세한 융단폭격을 맞으면서도 그는 꿋꿋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현했고 그 수위를 오히려 높여갔다. 몇 년 뒤 터져나온 것이 <즐거운 사라>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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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0월29일 마광수 교수는 ‘음란문서 제조 반포’ 혐의로 구속됐다. 검찰은 “지나치게 성적 충동을 자극해 문학의 예술성 범주를 벗어났다”며 사법 처리의 변을 밝힌다. 나는 그날을 꽤 명징하게 기억한다. 복학한 후 예전에는 무척이나 거리가 멀었던 도서관이라는 곳에 익숙해질 즈음, 도서관 휴게실에서 이어졌던 짧은 문답(?) 탓이다. “아니 그게 구속감이냐? 무협지 작가들, 주간지 소설 쓰는 사람들 다 잡혀가게?”라고 내가 물었을 때 한 법대생이 이렇게 답했던 것이다. “교수잖아. 레벨이 다르지. 사회적 파급력이 다르고.”
내가 이 문답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래도 운동권 물을 먹었다는 법대생 친구의 말이 신문에서 찾아 읽은 마광수 교수를 구속한 검사의 논리와 빼닮아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교육을 책임지는 교수의 신분에 그것도 유명 대학의 교수가 공동체 존립을 저해하고 성적 쾌락이라는 개인적 욕망만을 추구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은 무책임한 소행이다. 피고인 측에서는 <즐거운 사라>는 음란 서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음란 서적 기준은 작가의 주관적 판단에 따라서는 안 되고 도서 그 자체에 대한 판단에 따라야 한다.”
이 기소장을 쓴 검사는 “수만권의 장서를 가진 독서가”였다고 한다. 그는 “단순 음란의 단죄 차원이 아닌 위기적 상황에 처한 정신적 문화적 흐름에 대한 경고”의 필요성을 설파하며 징역 1년을 구형했고 1심에서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유죄 판결이 내려졌다. 3년 뒤 대법원도 마광수 교수의 상고를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
하지만 그래도 1990년대는 1980년대와는 달랐다. 1989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에 대한 여론이 주로 비난 일변도였다면 <즐거운 사라> 사건 때에는 연세대 총학생회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마광수 교수를 지지하며 그 무죄 주장에 목소리를 높였던 것이다. 그들이 내건 플래카드 역시 사뭇 도발적이었다.
“마광수는 결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 이는 다른 연세대 학생이 붙인 대자보에서 지적하듯 “같은 식민지 체험을 한 국민으로서 영국인들의 제국주의적 우월감을 비판 없이 차용한 것”임에 분명했고 주한 인도대사관까지 이 버릇없는 대자보에 항의하면서 고개를 숙이긴 했으되, ‘魔狂獸’가 셰익스피어 수준으로 격상된 사실은 시사하는 바 크다 할 것이다. 세상은 꽤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 80년대를 지배하던 도덕적 엄숙주의는 어느새 오리알 신세가 되어 낙동강 하구를 지나고 있었고 “지나친 성묘사로 쾌락주의를 조장”한다고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비판하던 이들은 점차 그 목소리에 힘을 잃고 있었다. 반면 ‘사랑’에 당당한 모습들은 좀더 빈번하게 눈에 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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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에 마광수 교수를 혐오하던 운동권들은 1990년대 들어 그를 옹호하기 시작했다. 1992년 장편 <즐거운 사라>가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구속되는 마 교수.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고 3년 뒤 대법원은 이를 확정했다.
<즐거운 사라> 사건이 있던 다음해 겨울이었을 것이다. 여자 후배 한 명이 감기에 들어 몸져누웠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런데 이유가 희한했다. 그 추운 겨울밤 밤새 거리를 헤매다가 그랬다는 것이다. 대관절 무슨 연유로 거리에서 밤을 지새웠냐고 물어보니 같이 자취하는 여학생의 군인 애인이 갑자기 휴가를 나왔다는 것이었다. 예고 없이 나온 휴가였지만 자취하는 친구는 “나 얘하고 자야 되니까 너는 오늘 나가서 자고 와 줘”라고 서슴없이 요구했고 밤 11시에 졸지에 쫓겨난(?) 여자 후배는 오갈 데 없이 거리를 헤매다가 자취생의 군바리 애인이 집을 떠난 뒤에야 몸을 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를 들으며 복학생들은 하나같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아니 용무가 있는 사람들이 여관으로 가야지 왜 함께 자취하는 사람을 쫓아내며, 추운 겨울날 애인과의 시간을 보장받기 위해 친구를 내쫓는 못된 처사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며 소매를 걷었던 것이다. 그때 흥분하던 친구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우리 같으면 그냥 다 같이 술 먹고 방구석에 제각각 자빠져 곯아떨어졌을 것 같은데. 요즘 애들 참.” 얼씨구 나이 몇 살이나 더 먹었다고 ‘요즘 애들’ 타령이냐고 비웃으면 할 말은 없지만 뭔가 세상은 다른 세상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1990년대에도 인적이 드문 캠퍼스의 심야 시간, 심심찮게 강력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따른 자체 규찰대가 조직돼서 야간 순찰을 돌았다. 이 규찰대들은 우범지대(?)를 돌면서 캠퍼스에 스며들어 음주가무를 즐기는 고등학생들을 쫓아내거나 취한 학생들의 싸움을 말리는 등 활동을 벌였는데 그들의 또다른 단속 대상 중 하나는 ‘캠퍼스를 여관 삼아’ 사랑을 나누는 청춘들이었다. 청춘들의 남녀상열지사야 70년대건 80년대건 숱하게 있었겠지만 당시 규찰대 활동을 하던 후배가 침을 튀기며 해준 얘기에 따르면 당시 심야의 캠퍼스에도 실로 많은 커플들이 그들만의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당시 규찰대의 무용담(?)을 듣다가 깔깔대고 웃은 대목이 있었다.
규찰대가 등장하여 플래시를 비추거나 인기척을 내면 대개는 화들짝 놀라서 주섬주섬 옷 챙겨 입고 사라지는 것이 상례였는데 어느 한 남학생이 규찰대에게 거칠게 대들어 ‘신성한 캠퍼스’에서의 풍기 문란 행위를 단속하던 규찰대를 당황하게 만든 것이다. 그는 이렇게 외치며 규찰대원들을 몰아붙였다 한다. “당신들은 안 하고 살아? 신성한 캠퍼스? 이것도 신성한 일이야!” 이 말은 한동안 유행어가 됐었다. “당신들은 안 하고 살아?” 그 말을 들으며 폭소를 터뜨린 다음 슬그머니 차오른 의문들이 있었다. 규찰대는 왜 그 청춘들의 ‘거사’를 굳이 방해하고 플래시를 비추며 ‘아저씨!’를 부르짖어야 했을까.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일도 아닌데 왜 ‘단속’의 대상이 돼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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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보면 1990년대는 그때껏 한국 사회를 지배했던 좋게 말하면 엄숙주의, 나쁘게 말하면 위선의 벽이 깨져 나가는 과정이었다. 밤이면 지하 세계에 펼쳐진 음습하지만 휘황한 공간에서 온갖 추잡한 욕망을 다 발산하다가 낮에는 짐짓 성도덕의 문란을 한탄하던 어른들의 세계는 말할 것도 없다.
더하여 ‘조직 내 연애 금지’를 내걸고 혁명가연하던, 술 먹고는 포르노 나오는 여관을 찾아 헤매고, 다음날 오후에는 전두환의 3에스(S) 정책(스포츠, 스크린, 섹스) 비판에 열을 올리던 이들조차도 노골적일 만큼 솔직해진 욕망들의 거침없는 지적 앞에 발가벗은 임금님 신세가 돼 머리를 긁적이던 시기였다는 뜻이다.
1994년 영화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엉덩이가 예쁜 여자’ 정선경에게 달라붙어 욕망을 채우는 중 운동권 청년이 부르짖던 ‘파쇼 타도’는 그 벌거벗은 임금님들에 대한 최대한의 조롱이었다. “파쇼 타도? 흥 니들은 안 하고 사니?” 하는.
1997년 6월 열린 한국여성학회 13차 춘계 학술대회에서 나온 이화여대 김은실 교수의 일성은 90년대의 단면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90년대에 이르러서는 마치 성적이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성이 상품화되고 상품이 성화되는 일상에서 성적 매력을 사회적 자본으로 사용하는 여성이 해방된 여성이라고 인정하는 젊은 ‘페미니스트’들도 등장하고 있다.”
“섹시하다”는 말은 칭찬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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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 아니 90년대 초만 해도 날렵한 청바지를 입고 온 여자 동기에게 “오 섹시한데?” 했다가는 “어휴, 짐승”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손칼을 맞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빠르게 ‘말과 행동에 성적(性的) 매력이 있다’는 뜻의 ‘섹시하다’는 형용사는 칭찬의 의미로 바뀌어 쓰였다. 즉 성적 매력을 보유한 것이 자랑스럽고 그를 찬미해 주는 게 부자연스럽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1996년 2월4일치 매일경제신문에 따르면 전국 20대 여성 500명에게 “남성들로부터 어떤 말을 들을 때 가장 기분이 좋은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1위 예쁘다, 2위 지적이다에 이어 ‘섹시하다’는 당당 3위를 차지하고 있다.(장담컨대 2위와 3위의 순위는 1년 내에 변경됐을 것이다) 또 섹시하다는 말에 대한 선호도는 여사원(20%)이나 기혼여성(15%)보다 여대생들로부터 그 선호도가 높았다.(26%) 즉 나이가 젊을수록 ‘섹시하다’는 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던 것이다.
욕망을 드러내는 것에 예의와 거리낌을 두지 않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행동에 대해 비난과 눈 흘김의 강도가 점차 줄어들던 시기가 90년대였다. 애인과 함께 여름휴가를 다녀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친구들에게 말할 수 있게 된 시기였고, 영화도 아닌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이 전라로 출연한다는 소식에 복학생들이 술값 아낀 배춧잎 꺼내 들고 대학로로 집결하던 때였다.

동시에 이 도도한 적나라(赤裸裸)의 물결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고 둑을 쌓고 수갑을 꺼내 들고 치도곤을 꺼내 드는 사람들이 설치던 과도기이기도 했다. 그 서슬에 마광수 교수가 당했고 영화 <거짓말>과 <노랑머리>가 가위질당했고 연극 <마지막 시도>의 연출자는 구속을 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게 쥐면 쥘수록 새어 나오는 모래처럼 사람들은 바뀌고 있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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