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8, 2014

이리역 폭발사고

“콰 쾅!”

33년전인 1977년 11월11일 오후 9시15분. 전북 이리시(현 익산시)의 이리역(현 익산역)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폭발음이 터졌다. 이 소리는 30Km 떨어진 전주까지 들릴 정도. 건국 이래 최대 사고인 이리역 폭발사고다.

청소년이나 20대에게 11월11일은 빼빼로데이나 가래떡데이로 기억되지만, 익산 시민들에게 이 날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공포의 날로 기억된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인천에서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현 한화의 전신)의 화물열차가 이리역에서 정차하던 중 발생했다. 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와 전기뇌관 40톤의 고성능 폭발물이 가득 실렸다. 사고의 직접적 원인은 어이없게도 어둠을 밝히기 위해 세워놓은 촛불 한자루였다.

당시 수사당국 발표에 따르면 화약호송원 신무일(당시 36세)씨는 11일 오후 역 앞 술집에서 막걸리 한되와 소주 한병을 마시고 열차로 돌아왔다. 신씨는 어두운 열차 안에서 촛불을 켜 닭털 침낭을 편 뒤 곧 잠에 골아떨어졌다. 부주의하게 켜져 있던 촛불은 침낭으로 떨어졌고, 잠결에 몸이 뜨거워진 신씨는 밖으로 튀쳐나왔다. 오후 9시13분. 신씨는 맨발로 뛰쳐나와 “불이야 불이야”를 외치며 역 사무실로 달려가 “빨리 대피하라”고 소리치고 달아났다. 한순간이었다. 불길이 옮겨붙은 화약은 커다란 굉음을 내며 한꺼번에 폭발했다. 이리역은 물론 인근 판자촌이 싸그리 사라졌다. 산산조각 난 열차의 파편이 100미터 멀리 시청 앞까지 날아갔다. 역에는 지름 30미터, 깊이 10미터의 웅덩이가 파였다. 마치 원자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사망 59명, 중상 185명, 경상 1158명, 모두 1402명의 인명 피해가 났다. 재산피해는 당시로선 어마어마한 규모인 4300만원.

역전 창인동 삼남극장에서 ‘화춘화 리사이틀’을 보던 700여명이 지진같은 충격에 극장 2층 천장이 내려앉는 바람에 객석에 깔렸다. 당시 사회를 보던 무명의 코미디언 이주일은 부상당한 하춘화를 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극장 객석에 깔려 사망한 사람은 5명, 10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날라간 열차 파편에 맞아 사망한 행인도 있었다. 1647세대 7800여명은 하루 아침에 집 없는 이재민 신세가 됐다. 이리역은 한동안 전쟁이 지나간 자리처럼 황폐했다.

도망쳐 숨어있던 신씨는 나중에 발각돼 붙잡혔다. 당시 화약류 등의 위험물은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바로 통과시켜야하는 원칙이 있었으나 지켜지지 않아 안전 의식 부재가 낳은 인재라는 비판을 받았다.

당시 이리역 주변 사창가에서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야했던 매매춘 여성들의 피해가 컸다는 후문이다.

그 뒤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해 익산시로 이름을 바꿈에 따라 이리역도 익산역이 됐다. 호남선, 전라선, 군산선이 통과하는 교통 요지인 익산역은 고속철(KTX)가 들어서며 역사도 화려하게 변신했다.

이리역 폭발사고는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졌지만 아직도 익산 시민들 가운데 그날의 굉음을 생생히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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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역 열차사고.

화학약품의 직송규정을 위반하였고, 위험물을 운반하는 호송인이 이리역 측에 항의했으나 묵살 당하였으며, 이 호송인이 술에 취한 채 폭발물이 가득 찬 화차 안에 촛불을 켜고 자다가 촛불이 넘어지면서 화약류에 불이 옮겨 붙어 대형 참사로 이어진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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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리역 인근 공연장에서 공연하던 가수 하춘화씨가 부상당하고 별세한 코메디언 이주일씨가 그를 업고 피신한 일화가 전해진다.
내용
1. 시기
  1977년 11월 11일 21시 15분

2. 관련인물과 사고전개
  가. 관련인물
  신무일(한국화약주식회사 수송원).

  나. 사고전개
사고열차는 사고 이틀 전인 11월 9일 11시 인천시 남구 고잔동에 있는 한국화약주식회사 제1공장에서 상기 화약류를 싣고 9시 43분 광주를 향해 출발했다. 화약열차는 그날 밤 11시 31분에 15량의 다른 화차와 함께 이리역에 도착했고 1605호 화물열차에 의해 중개되어 목적지인 광주로 출발하기 위해 사고지점인 4번 입환대기선에 머물러 있었다. 사고당시의 철도수송규정 제46조를 보면 화학약품의 수송은 되도록 도착역까지 직통하는 열차를 이용 수송할 것을 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화약열차는 광주로의 연계수송을 위해 무려 22시간여 동안이나 대기 중에 있었다. 한편 한국화약주식회사의 수송원이던 신무일(38세)은 화약류의 직송 원칙을 무시하고 수송을 지연시키는 데 대해 이리역 측에 항의를 하였으나 묵살되자 이리역 앞 식당에서 2홉들이 소주 한 병을 곁들인 식사를 한 뒤 다시 2차로 역전주점에 들러 막걸리를 마시고 얼큰한 취기에 초겨울의 한기를 느끼면서 화약열차에 들어갔다. 화차 속이 어두웠기에 그는 논산역에서 구입한 양초를 찾아 불을 붙여 화약상자 위에 세워놓은 뒤 취기에 한기가 엄습해오자 침낭 속에 들어가 잠을 잤다. 그 사이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 붙으면서 폭발이 일어났다. 이 사고로 인한 피해상황을 보면, 인명피해 - 사망 59명, 중상 185명, 경상 1,158명, 재산피해 - 가옥파괴 7,866동 등의 피해액 3억 5천만 원과 공공시설, 철도, 객화차량, 건물 등 파괴로 피해액 26억 4,600만원의 대형피해를 불러왔다.

3. 대책
이리역 폭발사고는 다이너마이트 등 위험 폭발물을 철도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안전대책의 미비와 호송의 소홀 등으로 빚어진 전형적인 인재(人災)였다. 이 사고는 피해규모에서도 끔찍한 대참사였기에 시민들에게 매우 큰 충격을 주었다. 더욱이 이렇게 엄청난 참사가 한국화약, 철도청, 호송인의 무사 안일한 태도에 기인했다는 사실은 시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또한 이 사고는 당시 한국 사회에 내재해 있던 문제점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여론은 이 사고가 직접적으로는 화약 호송원과 화주인 한국화약 및 철도 당국에 있다 하더라고 보다 더 높은 차원에서 볼 때는 적당주의, 정실주의로 일관하고 요행이 통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고는 정부가 화약류, 유류, 가스, 전기 등 생활 주변의 위험물에 대한 안전대책을 점검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대표적으로 서울시는 각 구청, 경찰서, 소방서원들로 합동조사반을 편성하여 화공약품 제조취급업소 및 가스판매 취급업소 등 폭발물제조취급업소에 대한 실태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폭발물의 제조원, 운반과정, 저장 상태, 안전관리여부 등을 세부적으로 조사하여 현행법 위반사항이 드러나는 폭발물 또는 제조업소 취급업소를 고발했고, 주택가에 있는 위험폭발물취급업소는 이전하도록 방침을 세웠다. 또 각종 화공약품의 제조, 운반, 취급 업무에 대한 현행법을 검토하여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법을 제정하도록 정부에 건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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