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November 8, 2014

사기꾼

 경북의 한 공원묘지에 있는 조희팔의 납골묘. 묘비에는 ‘창녕 조공희팔 가족지묘’라고 쓰여 있다. 묘지 등록부에 적힌 묘 주인도 조희팔이 아닌 ‘조영복’이다.  조희팔이 어린 시절을 보낸 경북 영천의 한 마을. 마을 주민들은 초등학교 졸업 후엔 조희팔을 본 기억이 없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공정식]

지난 4일 오후 서울시 구로구 개봉동의 한 건물 5층 사무실. 전세훈(33)씨가 전화기를 들고 “그쪽에 나타난 게 맞는 것 같다. 두 명이 조를 이뤄 잘 따라붙어 보라”고 말했다. 같은 시각 김상전(46)씨는 부산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한 제보자의 전화를 받은 직후였다.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기다려라. 조희팔.”

 추정 피해 금액 4조원. 피해자만 4만 명 이상. 희대의 다단계 사기범 조희팔을 쫓는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각에도 눈에 불을 켜고 있다. 이들은 모두 다단계 피해자 모임인 ‘바실련(바른가정경제실천을 위한 시민연대)’에 소속된 40명의 회원들. 2008년부터 7년째 끈질기게 조희팔을 찾고 있다고 해서 ‘40인의 추적자’로도 불린다.

 전씨는 2008년 모친이 조희팔의 다단계 사기에 걸려들어 수억원을 탕진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꼭 내 손으로 잡아 어머니의 돈을 받아내겠다”며 자진해서 추적자가 됐다. 추적자의 대장은 김상전 바실련 대표다. 그는 “추적자들은 20대에서 60대까지 다단계 사기 피해자와 그 자녀들”이라며 “전국으로 흩어져 조희팔이 숨겨놓은 재산에 대한 정보를 발굴해 검찰과 경찰에 제공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난 7월 대구지검은 조희팔의 은닉 재산으로 추정되는 760억원의 행방에 대해 재수사를 시작했다. 수사 과정에서 조씨의 은닉 재산을 확보한 뒤 개인적으로 팔아 차액을 챙긴 혐의로 김모(55)씨 등 6명이 구속됐다. 이 정보 역시 추적자들이 발품을 팔아 발굴한 것들이다. 추적자들은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수시로 화상회의를 한다. 정보도 교류하고 조희팔의 행적이 나오면 곧바로 추적하기 위해서다. 모인 정보는 바실련 본부에 있는 문서고에 고스란히 쌓여 있다.


 이들이 쫓는 사기범 조희팔은 1957년 경북 영천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가난했던 그는 창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홀로 대구로 갔다. “꼭 성공해서 가족들을 돌보며 돼지고기도 실컷 먹고 TV도 편히 보겠다”고 주변에 말하고서다. 대구에 온 10대 조희팔은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냉동식품 도매업소에 취직하기도 했다. 20대에 접어들면서 도박판 허드렛일을 하면서 영남권 최대 폭력조직인 ‘동성로파’ 행동대원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즈음 그는 자신의 인생을 바꾼 다단계를 알게 된다. 형이 일하던 우리나라 최초의 다단계 사업체인 ‘SMK(숭민코리아)’에 들어가 다단계를 본격적으로 접하고 배웠다.

 2004년 독립한 조희팔은 그해 10월 지인 10여 명의 도움을 받아 ㈜BMC를 차렸다. BMC는 ‘Big Mountain Company(큰 산과 같은 회사)’의 약자다. 회사는 목욕탕과 병원에 안마기·골반 교정기 등의 의료 기기를 임대한 뒤 수익을 배당한다고 속이고 투자자를 모았다. 한 계좌(440만원·의료기 한 대 가격)를 투자하면 8개월간 원금과 배당금을 합쳐 매일 2만6000∼4만2000원씩 166차례에 걸쳐 581만원(수익률 32%)을 준다는 조건이었다. 순식간에 입소문이 돌았다. 서울과 부산·인천·경남 등지에 유사한 회사도 만들었다. 리브·CN·챌린 등의 회사를 별개의 기업처럼 운영하며 경찰의 단속을 교묘하게 피했다. 당시 수사를 맡았던 경찰 관계자는 “의료 기기 임대업은 금융 다단계 영업을 위장하기 위한 것”이라며 “금융을 잘 모르는 40~60대 여성을 주된 타깃으로 삼았다”고 말했다.

 큰돈을 만지기 시작한 그는 단 세 가지 취미를 즐겼다. 골프와 여자, 도박이었다. 가끔 마약을 하기도 했다. BMW에 롤렉스 시계를 늘 차고 다녔다. 김 대표는 “사기범이지만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아파트 경비원에게 사과를 한 박스씩 사서 나눠주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예의 바르게 인사도 잘했다. 사기범으로 드러났지만 이웃들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고 말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후발 가입자의 돈으로 예전 회원에게 이자를 내주는 다단계 구조는 결국 한계에 봉착했다. 입금이 늦어지자 피해자들이 수사기관에 고소장을 내기 시작했다. 2008년 10월 사기 행각은 들통 났고 경찰은 압수수색에 나섰다. 당시 조희팔과 측근들은 수사 관계자들과 접촉해 사건 무마를 시도하기도 했다. 한 검사도 당시 조씨로부터 수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그는 2008년 12월 9일 충남 태안의 마검포항에서 어선을 타고 중국으로 밀항했다. 1만원권으로 7000만원의 돈다발을 선주의 손에 쥐여 주고서다. 막강한 현금동원 능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에서도 조희팔은 큰 사업가로 행세했다고 한다. 세 곳 이상의 집을 마련해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생활했다. 국내에서처럼 골프도 즐겼다. 수사망은 다른 사람 명의의 공민증을 만들어 피해나갔다. 대구경찰청의 한 경사는 이때 중국에 건너가 조희팔과 골프를 치고 근사하게 식사 접대를 받기도 했다.

 밀항 후 3년이 지난 2011년 12월. 경찰은 조희팔이 도피처인 중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화장을 했다고도 했다. 하지만 40인의 추적자들은 새롭게 찾아낸 조희팔의 생존 흔적과 은닉재산 현황을 조만간 수사기관에 전달할 예정이다. “반드시 잡고야 말겠다.” 조희팔의 추적자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전국 곳곳을 살피고 있다. 


[S BOX]조희팔 목격담도 들려

조희팔은 정말 사망한 걸까. “그렇다”고 답하기엔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다. 우선 그의 묘부터 미스터리다. 밀항을 통해 중국으로 달아난 조희팔은 2011년 12월 중국 웨이하이(威海)시의 한 호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돼 있다. 경북의 한 공원묘지에 가면 실제 묘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공원묘지 등록부에 적힌 묘 주인은 조희팔이 아닌 ‘조영복’. 조희팔이 중국에서 쓰던 이름이다. 진짜 죽었다면 굳이 가짜 이름을 등록할 이유가 없다. ‘창녕 조공희팔 가족지묘’라고 쓰여 있는 묘비 또한 의문스럽다. 조희팔의 가족 묘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경찰의 발표도 애매하다. 화장된 유골의 DNA를 조사했지만 유전자 감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는 거다. 피해자들은 조희팔이 사망했다는 호텔에 직접 확인한 결과 2011년 12월 한국인 남자가 사망한 사실이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서류상의 증거 또한 조희팔 생존설을 깨기엔 역부족이다. 중국에서 발행한 사망진단서가 유일한 증거다. 하지만 위조가 판치는 중국 상황을 감안하면 사망진단서쯤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피해자들의 주장이다. “사망하지 않았다”는 피해자들의 주장도 설득력이 있는 셈이다.

 조희팔 목격담은 지금도 드문드문 들린다. 지난해 초 대구 수성구에서 한 친구가 그를 보고 이름을 불렀더니 급히 달아나더라는 얘기부터 지난해 부산의 한 커피숍에서 직접 대면한 사람이 있다는 말까지 나돈다. 중국에서 조희팔의 신변 경호를 맡았던 측근 A씨는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정말 조희팔은 사망한 걸까. 진실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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