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5, 2021

노인 50억 사기

 혼자 사는 '땅 부자' 찾아온 남성들.....자신도 모르는 '배우자' 김 씨


20년 넘게 컨테이너에 사는 노인이 있다. 서울 양재동과 성내동에 50억 원대 땅을 보유한 67살 한 모 씨, 친지도 연락되는 사람도 없이 혼자 주차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물려받은 자산은 아닌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그는 이른바 땅 부호였다. 주변인들은 그가 사업을 정리하고 1992~3년쯤 이곳에 머무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2015년 1월 말쯤, 국가 정보기관 요원이라는 남자 서너 명이 한 씨가 살고 있는 컨테이너를 찾아왔다. "안기부 직원인데..." 한 씨는 이유를 모르지만, 안기부를 두려워했다. 전기충격기를 갖고 온 사내들에게 한 씨는 제압당했다.

남성들이 한 씨를 덮치기 보름 전쯤, 한 씨는 갑자기 결혼을 하게 됐다. 결혼 상대는 한 씨와 일면식도 없는 61살 김 모 씨. 김 씨가 한 씨의 인감도장을 몰래 파고, 증인 2명을 대동해 서류상 혼인신고를 낸 것이다.

허위 혼인신고를 낸 사람도 60대 어르신.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이대면서 인적사항과 증인 2명의 전화번호도 실제로 기재하면서 혼인신고를 내니 공무원도 깜빡 넘어갔다. 그렇게 불현듯 한 씨에게는 배우자라는 법률대리인이 생겼다.

'배우자'로 둔갑한 김 씨조차 한 씨를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상태였다. 김 씨는 주범 45살 정 씨가 "일이 잘 끝나면 빌라 한 채를 주겠다"는 말에 넘어갔다. 김 씨는 정 씨 부동산 투자회사의 정직원은 아니지만, 심부름을 해주며 안면이 있던 사이였다.

김 모(61) 씨는 ‘빌라 한 채’를 받기 위해 한 씨와 일면식도 없이 허위 혼인신고를 했다.김 모(61) 씨는 ‘빌라 한 채’를 받기 위해 한 씨와 일면식도 없이 허위 혼인신고를 했다.

"50억대 땅 부자가 혼자 산다는데...."

부동산 투자회사를 운영하는 주범 정 씨는, 한 씨의 소식을 자신의 회사 직원에게 전해 듣게 된다. 회사 직원 박 모(59) 씨 등 3명은 한 씨 근처 오피스텔에 사는 박 모(57) 씨에게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었다.

내용인즉슨 "50억 원대 땅을 가진 홀몸 노인이 있는데, 정신이 온전치 않다. 가족도 없고 연고도 없는 사람이라 그가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쓸 사람이 없다. 안기부 직원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또 "경계심이 많아 아무하고도 친하지 않은데, 오피스텔 건물주라고 자신을 소개했더니 이런저런 말을 해줬다"고도 했다.

이 말만 듣고 어떻게 '작전'을 짰을까. 박 씨에게 말을 들은 직원들이 사장 정 씨에게 보고했다. 전해 들은 정 씨조차 반신반의했지만, 걸린 돈이 50억 원이니 솔깃해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2년이 지나 경찰에 덜미를 잡혀 진술할 때도 "설마 진짜 그 말처럼 될 줄은 몰랐다"고 진술했다.

피해자 한 씨는 현재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땅이 팔리거나 자신이 ‘결혼’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피해자 한 씨는 현재도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땅이 팔리거나 자신이 ‘결혼’한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알고보니 땅주인은 조현병 환자

한 씨 땅이 넘어가는 것은 일사천리였다. 2015년 1월 '정보기관 요원'들은 국가 비밀 사업이라며 한 씨의 정신을 홀딱 빼놓았다. 조현병을 앓던 한 씨는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로 땅문서에 도장을 찍어 일당에게 넘겼다.

정 씨 등 6명은 2015년 2월 35억 원 상당의 양재동 토지를, 같은 해 4월 15억 원 상당의 성내동 토지를 제3자에게 모두 팔아넘겼다. 세금 등을 모두 제하고 손에 쥔 돈은 30억 원가량. 적당히 서로에게 나눴다.

생각보다 싱겁게,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돈을 가로채는 데 성공하자 뒷감당이 어려웠다. 일단 한 씨가 지내는 땅이 다 넘어갔으니 당장 한 씨를 컨테이너에서 꺼내와야 했다. 마침 팔아넘기기 전인 모텔이 하나 있었다. 적당한 말로 둘러대며 한 씨 손을 묶어 차에 태워 충북의 한 모텔로 데려갔다. 감금의 시작이다.

사진 출처=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사진 출처=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7개월의 감금생활 그리고 정신병원 강제입원

충북 등지의 모텔 2곳과 빌라 1곳에 한 씨를 7개월가량 데리고 다니며 사실상 감금을 시켰다. 2015년 4월 무렵부터 12월이 될 때까지 한 씨를 방에 가두고, 바깥에서 잠금장치로 한 씨가 나오지 못하게 막아놨다.

이동할 때, 그리고 한 씨가 머무를 장소 등에서 감시책 역할을 할 공범이 2명 늘어났다. 이렇게 일당은 8명이 됐다. 새로 끌어들인 이들에게 운전도 시키고 입막음도 하면서 한 씨 감금에 동원했다. 식사 등은 서류상 배우자인 김 씨가 담당했다.

쉽게 가로챈 돈이라 그럴까. 투자회사 사장 정 씨는 다른 곳에 투자하다가 돈을 모두 잃고, 나머지 공범들은 강원도 모처에서 도박 등 유흥비로 짧은 시일 안에 돈을 탕진했다. 30억 원이 금세 증발한 것이다.

돈이 없어지니 갈등이 생겼다. 일단 '빌라 한 채를 받기로' 했던 가짜 배우자 김 씨는 더 이상 한 씨에게 식사 등 수발을 드는 데 질렸다. 약속했던 빌라도 받지 못한 상황. 내분이 생겼다. 또 몇 사람씩 당번을 정해 감시를 하면서, 공범들도 더는 못 하겠다면서, 주범 정 씨에게 돈을 계속 요구했다. 정 씨도 투자 명목으로 돈을 지출하고 남은 돈이 없는 상황. 이들의 결속력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정신병원 입원 기록과 허위혼인신고 서류 등이 놓여 있다.정신병원 입원 기록과 허위혼인신고 서류 등이 놓여 있다.

법적 보호자된 '배우자'

정 씨 등은 이런 생각을 했다. 어차피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보이는데, 서류상 배우자인 김 씨를 법적 보호자로 내세워 한 씨를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다. 이들은 전북의 한 정신병원에 찾아가 한 씨를 입원시켰다.

전문의 판단은 조현병. 세간에는 조현병이 정신분열증이나 폭력성을 띠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조현병의 증세는 여러 분야에 걸쳐져 있다. 우울함이나 아무 관련 없는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심, 또는 정신지체 등. 한 씨 증세도 이런 종류 가운데 하나였고 정신병적으로도, 그리고 '법적 보호자'의 동의 여부도 입원에 문제 될 것이 없었다.

2015년 12월, 한 씨는 그렇게 정신병원에 입원한 채로 쓸쓸히 지냈다. 문제라면 문제랄까. 정신보건법상 환자는 한 병원에 6개월을 초과해서 머무를 수 없게 돼 있다. 보호자가 다시 와서 입원기간을 연장하든지, 다른 병원을 옮기든지 하는 조치가 필요했다. 한 씨는 2016년 4월 15일에 다른 병원으로 옮기고, 2016년 10월에 다시 처음 입원한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다시 6개월이 지난 2017년 4월 무렵. 한 씨가 병원을 옮겨야 하는 시점이 돼 법적 보호자 김 씨가 병원에 등장하던 날,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경찰관들이 들이닥쳤다.

사건의 주동자 정 씨가 대전의 모처에서 검거됐다.사건의 주동자 정 씨가 대전의 모처에서 검거됐다.

'서울→충청→전북', 2년의 공백...8명 어떻게 잡았나?

2015년 4월 한 씨는 원래 살던 서울을 떠나 충청 지역을 돌며 7개월간 감금 생활을 하고, 직후 1년 4개월가량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전에도, 그 이후에도 한 씨와 연락이 닿았던 사람은 전혀 없는 상황. 경찰은 어떻게 이들을 잡았을까.

2017년 3월 무렵. 첩보를 입수했다. "정신은 온전치 않았지만, 땅에 대한 집착 하나는 대단했던 홀몸노인이 있는데, 영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 노인이 보이지 않는 데다, 친지도 없는데 그가 살고 있던 곳에 공사가 진행되더니 건물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입주했다"는 말이 경찰의 귀에 들어왔다.

24년 정도를 혼자 컨테이너에서 살던 60대가 행방이 묘연하고, 그 자리에 택지가 개발됐다는 얘기. 수사에 착수했다.

실마리는 한 씨와 허위 혼인신고를 했던 김 씨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여러 방식으로 수사한 끝에, 한 씨의 병원 연장 일자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김 씨가 병원을 갔던 2017년 4월 어느 날, 김 씨 앞에 등장했다.

법적 보호자 신분이기도 했던 김 씨는 한 씨 정신병원 입원도 계속해서 '챙겨야' 하는 입장으로서 불만도 많았다고 한다. 그를 통해 주범 등에 대한 정보를 얻었고, 곧바로 주동자 정 씨 등을 찾아내 붙잡았다. 지난 2년간 공범들로부터 시달림을 많이 받았다던 그는, 이미 사건의 전말을 알고 등장한 경찰에게 진술하면서 혐의와 관련한 내용을 부인하지 않았다.

경찰은 일당 8명을 4월과 5월에 걸쳐 모두 검거하고, 4명을 구속, 4명을 불구속 입건해 조사를 마쳐 검찰에 송치했다. 그중 주범이라고 볼 수 있는 인물은 사실 6명이었다. 운전기사나 단순 감시책을 맡았던 2명을 사건의 종범으로 보고 불구속 입건했다. 주범 6명 중 2명은 이미 다른 사건에 엮여 구속돼 검찰에 넘어가 이번 사건으로 따로 구속할 필요가 없었다.

땅주인 한씨는 빈털털이....여전히 정신병원에

정신질환이 있는 홀몸노인의 전 재산 50억 원을 가로채고 납치, 감금해 7개월을 끌고 다니고서 정신병원에 1년 넘게 강제로 입원시킨 일당이 모두 붙잡혀 검찰에 넘어갔다. 형사 사건으로서 경찰이 할 일은 마친 셈이다. 그들의 혐의는 검찰이, 그리고 이후 재판과정에서 죄명으로 바뀌고 벌 받을 것이 있다면 받을 것이다.

한 씨는, 여전히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갈 곳도, 한 씨를 보호할 인물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다. 일단 경찰 측은 즉시 한 씨의 법적 보호자를 가짜 배우자이자 사건의 공범인 김 씨에서 한 씨 거주지를 담당하던 지방자치단체의 장(구청장)으로 바꿨다. 그러나 모든 재산을 잃은 한 씨는, 보호자도, 집도, 생활비도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정 씨 등이 가로채 간 돈은 이미 수년 전 여러 사람을 거쳐 거래가 완료된 상황. '모르고 한 거래', 즉 선의의 거래라면 환수도 어려운 상황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경찰이 수사를 진행하고는 있지만 이미 택지 개발도 완료되고, 입주자도 들어선 상황에서 환수하기에는 현실적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또 도박이나 유흥비로 이미 탕진한 지도 시일이 지난 상황이라 범죄 수익금을 환수하기 어렵게 됐다.

경찰 관계자는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정신질환이나 노령으로 법률적인 행위 능력을 제대로 할 수 없는 홀몸노인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 재산을 노린 범행 또한 증가추세라며, 비단 한 씨만의 일이 아닐 수 있음을 우려했다. 또한 성년 제도나 법률 행위 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제도가 더욱 촘촘해질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경찰은 경제적 기반을 모두 잃은 한 씨의 치료 및 생계비 지원 방안 등을 마련하면서, 앞으로 한 씨에 대해 민사상 후견 제도, 피해회복 등을 위한 법률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관계기관과 지속적으로 협의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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