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September 5, 2021

chef

 넉넉한 환경이 아니다보니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지하철역 앞에서 찹쌀떡 떼어다 팔고 신문 배달하며 용돈을 벌었죠.”

7성급 호텔로 불리는 두바이 호텔 ‘버즈 알 아랍’ 출신 셰프이자 복합문화공간 ‘사운즈한남’의 총괄셰프를 지낸 박민혁(40) 셰프의 어린시절은 그의 커리어와는 달리 윤택하지 않았다. 동네 밥집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암 투병을 시작하며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고 고 3때 아버지가 돌아 가시면서부터는 할머니를 모셔야 하는 소년가장이 됐다.

고달픈 일들이 많았을 것 같은 서사지만 그는 성공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어려운 환경을 이겨내고 셰프로서 성공이라 할 만한 커리어들을 쌓았다. 이제는 좀 편히 지낼만도 하지만 그는 지금도 쉬지 않고 다양한 작업들을 진행 중이다. 

그는 서울 성산동에서 와인바를 운영하고, 요리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구독자들에게 다양한 요리를 선보이고 있으며 대학에서 학생들도 가르친다. 다양한 분야의 셰프들이 팝업 스토어 형태로 식음료를 제공하며 고객 반응을 테스트하는 요리연구소 설립도 준비 중이다. 컨설팅도 한다. 몸이 열 두개라도 모자라보이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다는 그를 그가 운영하는 서울 성산동의 와인바 킥에서 만났다.


-소믈리에도 아닌데 일반 레스토랑이 아닌 와인바를 열었습니다.

“와인을 엄청 좋아한다. 처음부터 좋아하진 않았는데 와인을 정말 좋아하는 멘토와 함께 2~3년 정도 마시다보니 자연스럽게 빠졌다. 사실 셰프들이 와인은 잘 모른다. (웃음) 좋아하는 와인을 공부도 할겸 와인바를 열었다.”

-주택이 밀집한 성산동에 와인바를 연 것이 특이하다. 강남이나 한남동에 보통 많지 않나.

“안 그래도 여기에 와인바를 열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많이 말렸다. 상권도 없고, 와인이 잘 팔릴 것 같지 않은 분위기라고 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해보고 싶었다. 상권도 없고 연고도 없는 이곳에서 브랜드를 만들어 낸다면 더 의미가 있지 않겠나. 처음 3개월 정도는 좀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의외로 첫날부터 만석이었다. 1주일에 보통 하루 빼고는 전부 만석이다. 와인은 3만원대를 많이 준비했는데 막상 가장 잘 나가는 와인은 8만~15만원대다. 이런 걸 보면 상권이 레스토랑의 위치를 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닌 것 같다.”

-셰프의 커리어에 비춰볼 때 음식 값이 비싸지 않은 것 같은데.

“강남, 한남에 있는 와인바에 갔을 때 아쉬웠던 점들이 있었다. 안주 대부분이 프로슈토 같은 햄 종류나 견과류, 치즈 등으로 한정적이었다는 점이었다. 좀 더 다양하게 제공하고 싶었다. 메뉴는 다채롭게 가져가되 양을 줄여 한 번에 여러가지를 맛 볼 수 있도록 했다. 음식 값은 부담스럽지 않게 1만원 이하부터 비싸도 2만원 중반을 넘지 않도록 책정했다.”


-어려운 형편에도 요리로 성공했다. 처음 요리는 어떻게 시작한 건가.

“고등학교 때부터 피자헛에서 주방,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돈을 벌었다. 4년 정도 같은 일을 계속하다 보니 지루하더라.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생겼다. 오토바이라는 취미 이외 좋아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다 어릴적 아버지의 주방에서 일을 도왔던 것이 떠올랐고 요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요리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까지 모셔야 하는 형편에 대학 등록금은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 무료로 요리를 배울 수 있는 곳이 있었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한남직업전문학교였다. 수강생의 연령대가 다양해 60대와 한 공간에서 요리를 배웠다. 다들 목표가 뚜렷해 경쟁이 치열했지만 매 수업마다 최선을 다했고 그를 눈여겨 본 당시 메리어트 호텔의 조리장이었던 전주대 김지응 교수의 눈에 띈 그는 ‘한그린’이라는 레스토랑에 소개를 받아 취업했다. 초창기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던 한그린은 하루 매출만 1000만원이 넘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한그린에 들어가면서부터 양식 요리로 진로를 결정한건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한그린에서 양식의 매력에 푹 빠졌다. 조우현 조리명장(조리명장은 국내 12명 뿐이다)이 계신 곳이다보니까 배울 점이 참 많았다. 엄청 바쁜 곳이었는데 주방 분위기는 굉장히 좋았다. 강압적인 분위기에 후배에게 폭언을 하는 다른 업장들과는 달랐다. 모두 행복하게 요리했고 퇴근 후에도 자발적으로 남아 요리대회를 준비했을 정도로 열정이 가득했다. 요리를 대하는 태도, 일하는 방식 등을 많이 배웠다.”

-막내였으면 설거지만 했을텐데 요리를 배울 시간이 있었나.

“당시 막내들은 하루종일 설거지만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요즘 체계가 갖춰진 레스토랑들은 셰프들이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설거지만 해주는 스튜어링이라는 직책을 따로 두기도 하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설거지만 하면 요리를 배우기 어려우니 한 두시간씩 일찍 출근해서 연습했다. 중간중간 선배들을 돕거나 선배들이 잠시 쉴 때 궁금했던 걸 물어보면서 요리를 배웠다.”

-일을 하면서 대학에도 다녔다고 한다.

“그때는 주 6일에 밤까지 일할 때라 대학에 다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근데 조우현 명장님께서 야간대학을 권유해주시면서 내가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해주셨다. 주 3일 정도는 학교에 가기 위해 오후 6시에 퇴근하는 대신 쉬는 날 없이 매일 업장에 나가서 일했다. 너무 재미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6성급 호텔인 W 서울 워커힐(현 비스타 워커힐 서울)이 문을 열 때 자리를 옮겼는데.

“야간 전문대를 다니고 있을 때 W호텔이 생긴다는 말을 들었다. 주위에서 한 번 이력서를 내보라고 해서 냈다. 전문학사 이상의 자격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었는데 재학 중에 내서 떨어졌었고, 졸업 후 합격했다. 면접을 보러 갈 때 넥타이를 못 매서 그냥 노타이로 갔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타이를 매지 않아 오히려 좋게 봤다고 하더라. W호텔은 일반 호텔과는 달리 매니저가 머리를 푸르고 다녔고 회사에서도 귀고리, 코걸이를 선물로 줄 정도로 자유로운 분위기여서 그랬던 것 같다. W호텔에선 영어 이름을 쓰면서 모두 수평적으로 소통했다. 동서양이 믹스된 음식들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시야를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년 정도 일하다 두바이로 갔다.

“W호텔 업장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가 두바이 버즈 알 아랍에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당시 에드워드 권 셰프가 총괄셰프로 그 선배를 데려 갔었다. 나도 가고 싶었다. 영어는 잘못했지만 무작정 지원했고 면접에 대비해 영어 답변을 달달 외웠다. 3개월 후 전화로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합격해 두바이로 갔다.”

-호텔 출근을 위해 떠난 두바이에서 자신도 모르게 실종된 에피소드가 있었다고.

“공항에 도착하니 호텔 직원이 픽업을 나와있었다. 숙소로 데려다주면서 하룻밤 자고 호텔 인사팀을 찾아가면 된다고 했다. 영어를 잘 못해서 그 말을 잘 못 알아들었다. 다음 날 호텔 방에서 마냥 기다렸는데 아무도 픽업을 안 오더라. 그래서 시내에 나가서 구경을 하고 밤에 돌아오는 생활을 며칠 반복했다. 나흘쯤 뒤에야 아침에 누가 내 방을 두드리더라. 내가 호텔에도 오지 않고 방에도 없어 실종된 줄 알았단다. 우리나라였으면 진짜 크게 혼났을 것 같은데 다같이 웃고 넘어갔다.”

-왜 먼저 호텔에 가볼 생각은 안 했나.

“다른 호텔은 그냥 들어갈 수 있다. 근데 버즈 알 아랍은 다리를 건너야 호텔에 들어갈 수 있다. 예약을 안 하거나 정직원 사원증이 없으면 그 다리를 건널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봤었다. 그래서 인사팀에서 나를 데리러 오는 걸 기다리고만 있었다.” (웃음)

-버즈 알 아랍 호텔 주방에서 일한 이야기를 소개해달라. 인종 차별은 없었는지도 궁금하다.

“입장할 때 5만~7만원 정도를 내고 들어가는 호텔이라 레스토랑도 굉장했다. 혼자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기본적으로 30만원은 쓰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2교대로 근무를 했는데 난 교대 시간에도 퇴근하지 않고 하루종일 일했다. 일하는게 너무 행복했다. 생각해봐라. 외국에 나가야만 볼 수 있었던 캐비어, 푸아그라, 트러플 등 진귀한 재료들이 냉장고마다 그득그득했으니 얼마나 좋았겠나. 이런 재료들을 참치, 스팸, 계란처럼 쓸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레스토랑은 골프공 만한 트러플 2~3개를 주문해서 굉장히 아껴쓴다. 근데 거기선 트러플 프로모션을 한다고 3억원어치를 시켜서 쓰는 거다. 정말 행복했다.

내가 있던 주방에선 30명 정도가 함께 일했다. 그중 같은 국적이 한 명도 없었다. 가뜩이나 영어를 못했는데 국적이 다양해 억양들이 다 다르다보니 의사소통하는데 더 애를 먹었다. 한 달동안 업장의 모든 소리를 녹음해서 숙소에서 반복해 들었더니 귀가 트이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을 편하게 할 수 있을 정도로 영어가 늘더라. 인종차별은 없었다. 출근 첫날부터 축구를 같이 했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다.”

박 셰프는 버즈 알 아랍에서 2년 정도 일했다. 한국에서 레스토랑을 열기 위해 귀국한 에드워드 권 셰프의 제안으로 버즈 알 아랍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시안 퓨전부터 유러피안 레스토랑까지 다양한 스타일의 레스토랑을 경험한 시기였다. 에드워드 권과는 10년 정도 함께 레스토랑을 운영했다.

-호텔, 일반 레스토랑 둘 모두를 경험했다. 경험자로서 두 유형 가운데 추천하는 일터가 있다면.

“예전에는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호텔에 들어가야 했고, 또 들어가고 싶어하는 코스이기도 했다. 양식을 하는 사람이라면 총주방장이 대부분 외국인이었고 그 사람이 레시피를 알려주다보니 더욱 호텔로 가고 싶어했다. 복지도 좋고, 체계도 더 갖춰져 있으니 일하는 사람으로선 더 좋았던 게 사실이다. 

근데 지금에 와서는 외국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온 셰프들, 호텔을 경험한 셰프들이 10년, 20년이 지나 자신만의 특색있는 레스토랑들을 많이 차렸다. 그러다 보니 요리를 위해 굳이 호텔에 갈 필요가 없어졌다. 자기 색을 추구하면서 요리를 배우려면 호텔보다는 레스토랑을 추천한다. 호텔은 요리를 배우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좋은 레스토랑을 갖춘 호텔은 사실 얼마 안 된다. 현실적으로 업장의 직원들 복지를 챙겨주려면 근무시간을 줄일 수밖에 없다. 그럼 홈메이드로 만들던 걸 냉동제품으로 바꿔야 한다. 나 때는 호텔에서 냉동을 쓴다는 건 말이 안 됐지만 요즘에는 많이 쓴다. 개인적으로는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배우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박 셰프는 에드워드 권 셰프와 함께 일할 당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주 6일, 하루 15시간씩 근무하던 때였지만 쉬는 날 하루를 이용해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십여년 간에 걸친 다양한 레스토랑 운영 경험에 경영 지식까지 갖췄던 그는 당시 문을 열 준비를 하고 있던 복합문화공간 사운즈한남의 총괄셰프 자리를 제안 받았다.

-총괄셰프는 무엇을 하는 자리였나.

“당시 사운즈한남에는 와인바, 브런치 카페, 유러피안 레스토랑 등 5개 업장이 들어갔고 각 업장마다 주방장과 매니저 등이 있었다. 이들을 콘트롤 하는 것이 총괄셰프의 역할이었다. 메뉴 개편 때 셰프들이 만든 음식을 함께 맛보고 보완점을 이야기해주기도 하고, 메뉴를 직접 만들어 넣기도 했다. 레스토랑에 직접 가서 일을 돕기도 했다.”

총괄셰프로 3년 가량 근무하던 그는 유튜브로 눈을 돌렸다. 지난해 겨울 ‘공격수 셰프’ 채널을 만들었다. 그는 양식부터 한식까지 다양한 요리를 만드는 콘텐츠 뿐만 아니라 셰프들을 초청해 레스토랑의 뒷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한다. 라이브 방송으로도 구독자들을 만난다.  구독자도 꾸준히 늘어 2021년 9월 현재 12만명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앞으로의 목표, 계획이 있다면.

“코로나로 집콕 생활이 늘면서 주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하나의 짜임새 있는 구조를 갖춘 주방 브랜드를 만들고 싶다. 요리를 많이 해본 셰프가 만들면 더 효율적으로 공간을 구성할 수 있지 않겠나. 많은 집들이 제가 만든 브랜드의 주방 공간을 넣을 수 있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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