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September 10, 2014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蟲). 이 이름이 낯설게 느껴진다면 그의 대표작을 들어보자. <우주소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원제목: 정글대제), <사파이어 공주>(원제목: 리본의 기사)! 잊고 지내던 어릴 적 친구들을 만난 것 같지 않은가? 일본에서는 ‘만화의 신’이라고 불리는 그.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데즈카의 어린시절
데즈카는 1928년 11월 3일 오사카 근처의 신흥관광도시 다카라즈카에서 태어났다. 유복하고 개방적인 가정에서 자란 그는 언제나 만화와 함께였다. 만화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책꽂이에는 만화 단행본이 가득 꽂혀 있었다. 그가 만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2학년 때다. 5학년 때는 노트1권을 가득 채운 장편만화를 창작하기도 하면서 작가적 기질을 보였다. 이에 그의 어머니는 거금을 들여 2백 권이나 되는 만화책을 구입해주는 등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데즈카는 어머니와 함께 자주 다카라즈카 가극을 보러갔다.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다카라즈카 가극은 그에게 최고의 공연예술이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리본의 기사>는 그의 ‘가극중독’이 완치되지 않았을 때 만들어졌다. <리본의 기사> 의 주인공인 사파이어 공주는 왕위계승을 위해 가짜 남자로 살면서 한편으로는 이웃나라 왕자를 사랑하는 금발머리 처녀가 되고 싶어한다. 사파이어가 이처럼 심리적으로 양성성을 지닌 것은 다카라즈카 가극에서 여배우가 남자 역할도 하던 것에 대한 인상이 남아서라고 한다. 또한 데즈카는 자신의 작품 속 등장인물을 연극 단원처럼 여겨서 다양한 역으로 많은 작품에 등장시키는데 그는 이를 ‘스타시스템’이라고 불렀다.
외과의사와 만화가의 길 그 사이에서
그의 프로필을 보면 눈에 띄는 부분이 있다.
학력: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 전문부
흰 가운을 입은 의사와 아톰을 그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겹쳐서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그가 이런 경력을 가지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태평양전쟁 당시, 오사카의 명문 중학교에 다니던 데즈카는 시력이 나빠 사관학교 대신 강제수련소로 보내졌다. 그는 ‘지옥 같다’고 회상했던 이곳에서 양팔에 심한 발진이 생겼고 한참동안 병원에 다녀야 했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건 이때. 데즈카는 1945년에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부 전문과정*에 입학한다.
이후 데즈카는 의사와 만화가라는 두 갈래의 길을 오가게 되었다. 대학에 입학한 다음 해인 1946년, 소국민 신문*에 <마짱의 일기장>이라는 네 컷짜리 카툰을 연재하여 만화가로 데뷔한 것이다. 이어서 1947년 발행한 <신보물섬>은 무려 40만 부가 팔린다.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쉽게 의학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1953년에 국가시험을 통과한다. 그러나 그는 의사로 개업하거나 진료행위를 한 적은 없다. 결국에는 만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의 만화는 희망이었다.
 데즈카는 1950년 <정글대제>(밀림의 왕자 레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52년에 <우주소년 아톰>, 이듬해에는 순정만화 <리본의 기사>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유명 만화가의 자리를 굳혔다. 데즈카의 이 초창기 3대 작품의 주인공들은 숙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다. 천재 과학자가 죽은 아들을 대신해 만든 아톰은 자라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커스단에 팔린다. 레오는 엄마 사자가 사냥꾼에게 붙잡혀 런던으로 팔려가던 도중 태어나 바다로 뛰어내려야 했고 사파이어는 천사의 실수로 남녀의 양성을 모두 가진 채 태어났다. 이들이 모든 고난을 이겨내고 승리하는 모습은 패전 후 무기력했던 일본 어린이들의 희망이 되었다.
 961년 데즈카 오사무는 6명의 스태프와 함께 <무시프로덕션>을 창립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월트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이 강세였고 상대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은 위축된 상태였다. 데즈카는 디즈니의 제작방식을 따르지 않고 일본에서는 최초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1963년, 드디어 일본 최초의 TV애니메이션 <철완아톰>이 탄생한다. 이어서 1965년에는 일본 최초의 컬러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정글대제>가 방영되었고 그는 세계적인 만화가가 되었다.
데즈카 오사무는 노동착취자?
 <철완아톰>의 제작비 절감을 위해 무시 프로덕션의 만화가들은 과중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데스카 오사무는 당시 TV극영화 제작비가 4~50만 엔이었기 때문에 스폰서가 없을 것을 우려해서 편당 55만 엔이라는 가격을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이었고 많은 애니메이션 관계자들이 그를 비판했다.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는 추모사에 조차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긴다.
덕분에 이후의 아니메 제작비가 언제나 바닥에 머무는 폐해가 생겼습니다. 애니메이션에 관해서 여태까지 데즈카 씨가 말해온 것이라든지 주장한 것은 전부 엉터리라고 생각합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추모사 중-
 
‘만화의 신’ 그의 만화에 대한 열정
그에 대한 비판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의 열정이 담긴 만화들을 사랑했다. 평생 15만 쪽이 넘는 작품을 그린 데즈카 오사무. 그는 마지막 미완성 작품인 <불새>를 그리면서도 병상에서 "일을 달라. 일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외쳤다. 1989년 그는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열정이 담긴 만화는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앞으로도 영원히 ‘만화의 신’으로 기억될 것이다.
신성은 기자<ttd0426@hotmail.com>
*오사카 제국대학 부속 의학부 전문과정: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해 군의관을 보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중학 졸업생을 받아 이 과정을 이수하면 전문학교 졸업자격을 주었다. 일종의 군의관, 위생병 양성과정.
*소국민 신문: 현재의 마이니치 소학생 신문
*디즈니 식의 풀 프레임 애니메이션이 1초에 24장의 그림을 사용해(실사 영화와 동일) 촬영하는 것에 반해 1초에 24장 미만의 그림으로 24장의 효과를 내는 저 예산 애니메이션 기법.
*미야자키 하야오: 일본의 애니메이션 영화감독. 대표작 <미래소년 코난>(1978),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 <천공의 성 라퓨타>(1986), <이웃집 토토로>(1988), <빨간 돼지>(1992), <원령공주>(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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