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브랜드 가방을 수십만원 주고 사느니 보태서 명품을 산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이 잦아들고 있다. 재력의 과시에서 안목의 과시로 고급가방의 용도가 바뀌면서 패션피플들이 매의 눈으로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왼쪽부터) 뮤리에르 토트 겸 숄더백 36만8000원, 이카트리나 뉴욕 ‘라라’ 81만6000원, 샤나에잇스애비뉴 클러치 39만6000원, 힐리앤서스 ‘패션’ 89만원
가구 디자이너 한정현(39)씨는 얼마 전 서울 가로수길을 지나가다가 눈에 띄는 빨간 클러치를 발견했다. 손바닥만한 가방 하나의 가격이 75만원. 수입 명품인가 싶지만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이카트리나 뉴욕’(Ekatrina newyork)의 제품이다. “화려하고 포인트가 될 수 있는 가방을 사고 싶었거든요. 그즈음 꽂힌 색깔이 빨간색이었고요. 송치 가죽으로 만든 빨간 클러치를 보는 순간 한눈에 반했어요.” 그는 망설임 없이 가방을 구입했다. “가방을 살 때 첫번째 조건은 남들이 흔히 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누구나 아는 명품은 오히려 피하게 되더라구요.”
한씨처럼 브랜드, 로고 등과 상관없이 개성있는 디자인의 가방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다. 잘 만든 가방이라 마음에 쏙 드는데 로고가 무슨 상관이냐고 그들은 묻는다. 오히려 로고가 붙어 있지 않아서 더 좋다 한다. ‘로고리스’ 가방의 역습이다.
가방 하나 사려면 면세점 갈 일 없으려나 생각하던 시대에서 미묘한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다. 값비싼 가방은 신분 과시용이고 또 효과적인 과시를 위해 로고가 선명한 수입 명품을 선택한다는 공식이 깨져나가기 시작했다. 오히려 그 노골적인 과시가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가격경쟁력이 아닌 디자인으로 승부하는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주목받고 있다. 이 변화를 재빠르게 포착한 건 역시 유통업계다.
‘0% 대 51%’. 올해 1~9월 온라인쇼핑몰 에이케이(AK)몰에 입점한 명품 브랜드 ‘로고백’과 디자이너 브랜드 ‘로고리스백’의 전년 대비 성장세의 차이가 극명하다. 명품·럭셔리 브랜드로 분류되는 업체들의 가방 매출이 전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멈칫거리는 사이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가 중심인 ‘로고리스’ 가방의 인기는 치솟았다.
(왼쪽부터) 기어스리 백팩 겸 숄더백 26만8000원, 폴렌 ‘길리 백팩’ 58만원, 로우로우 백팩 12만9000원
“소비자의 욕구를 파악한 즉시, 상품기획자(MD)들이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를 찾아 서울 청담동, 가로수길, 홍대 등에 시장 조사를 나갔죠.” 애경 홍보실 김재욱 대리의 설명이다. 지난 4월18일 에이케이몰은 ‘국내 디자이너 백 전문관’을 오픈했다. 유르트(YURT), 잇츠백(ITSBAG) 등 10개 브랜드가 입점했다.
지난 9월5일 동대문 쇼핑몰 ‘두산타워’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기존 60여개에서 100여개로 대폭 강화한 리뉴얼 매장을 선보였다. 고객의 발길이 가장 잦은 1층과 지하 1·2층 매장을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로 채웠다. 한은혜 두산타워 마케팅팀 과장은 “과거 ‘초명품’ 아니면 ‘저렴한 보세 가방’이던 가방 시장이 변화하고 있다”며 “(1층에서 가장 넓은 매장인) 이호재 디자이너의 ‘호재’(HOZE)의 경우 좋은 가죽과 품질로 연예인들도 찾다 보니 한류의 영향을 받은 중국 관광객 매출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백화점도 앞다투어 편집 매장이나 팝업 스토어(임시 매장) 등을 통해 국내 디자이너 가방 브랜드를 소개하고 있다. 롯데백화점 본점에 입점한 디자이너 브랜드 ‘루즈앤라운지’는 올해 110% 넘게 매출이 늘었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 7월 부산 센텀시티점의 핸드백 매장을 리뉴얼하면서 디자이너 브랜드를 처음으로 대거 입점시켰다.
이렇게 바뀐 시장 분위기에 국내에서 판로를 모색하기 어려워 해외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가방 디자이너들이 돌아오고 있다. “아무리 가방을 잘 만들어도 워낙 명품 중심으로 돌아가는 한국 시장에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던 분위기가 “제대로 만들면 국내에서도 승산이 있다”는 쪽으로 바뀌어가고 있는 셈이다.
(위) 뽐므델리 ‘아르’ 44만5000원, (아래) 유르트 ‘크루아상 백’ 23만80
“2년만 먼저 시작했어도 망했을 거란 바이어들의 말처럼 운이 좋게도 시대 변화의 흐름을 탔다”고 정희윤 뽐므델리(pommedellie) 대표는 말했다. 그는 장어 가죽으로 가방을 만드는 자신의 브랜드를 2009년 론칭했지만 제품은 유럽에서 먼저 선보였다. “유럽 소비자들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와 가치 소비가 우리나라에도 전파되리라” 예상하고 2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국내 시장에 진출했지만 소비자 반응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다”고 한다.
미국 뉴욕에서 핸드백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2012년 가을 한남동에 ‘샤나에잇스애비뉴’(SHANA 8th avenue) 매장을 낸 한소윤 대표도 해외 시장을 겨냥하려다 국내로 시선을 돌린 경우다. 매장을 열고 처음으로 들어왔던 자매 사이인 손님 2명이 3개의 가방을 사갔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 “병적으로 명품 가방에 집작하는 한국 소비자들에 염증”을 느끼고 “국내 패션 기업들이 명품 가방 디자인을 카피해 명품 중심 시장을 만드는 데 일조”한다는 생각을 했다는 디자이너 강정은씨도 지난해 말 ‘뮤리에르’(mulier)를 론칭했다. “개성있는 아이템을 원하는 소비자들을 위한 가방”을 만들겠단 생각에서였다. 6개월 만에 1억원의 매출을 올리면서 “예상이 적중했다”고 느꼈다 한다.
갈수록 수요가 늘고 있는 ‘백팩’ 시장에서는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가 더욱 강세를 보이고 있다. 배우 이미연이 외국 여행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 <꽃보다 누나>에 메고 나와 화제가 됐던 국내 디자이너 브랜드 폴렌의 ‘길리 백팩’은 브랜드 론칭 9개월 만에 1만개가 넘게 팔려나갔다. 2012년에 이의현 대표를 비롯한 젊은 디자이너·상품기획자 6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브랜드 로우로우의 백팩은 3만개가 넘게 팔려 지난해 35억원에 이어 올 초부터 10월까지 40억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중이다. 이런 디자이너 브랜드들은 서울 강남의 청담동, 가로수길, 홍익대 앞 등 패션에 관심있는 이들이 많이 찾는 곳에 매장을 내고 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이런 흐름은 지난해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아동학부 교수 등이 <트렌드 코리아 2014>(미래의창 펴냄)를 통해 예측한 소비 트렌드와 일치한다. 김 교수는 지난달 27일 <한겨레>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소비자들이 명품보다 개성있는 가방을 원하는 흐름은 올해 가장 강력한 소비 트렌드로 지목한 ‘스왜그’(swag)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호재 ‘폴디드 리미티드’ 10만8000원
‘약탈품, 장물’이란 뜻에서 힙합 문화를 거치며 ‘멋지다, 뻐기다’라는 뜻으로 확장한 ‘스왜그’는 어느새 ‘정형화되지 않은 자기 고유의 멋과 느낌을 표현하는 현상’이란 뜻을 확보하고 있다. ‘절대 강자’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며 기성세대와 선을 그으려는 이들이 ‘스왜거’다.
“명품 소비에 깃들어 있던 ‘과시하고자 하는 욕망’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에요. 무엇을 과시하느냐가 달라진 거죠. 옛날에는 고소득층을 추종하며 명품을 소비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안목을 과시하는 거죠.” 누구나 보면 한눈에 아는 브랜드는 스왜그 정신에 위배된다. 나만의 고유한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로고가 감춰진 ‘로고리스’ 브랜드에 지갑을 연다.
이런 흐름은 얼마나 지속될까. “보여주기 식의 소비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자기만족을 위한 가치 소비 트렌드가 확산될 것”이라는 신세계백화점 관계자의 말을 비롯해 유통업계는 대체적으로 이러한 흐름의 확산을 예상했다. 김난도 교수는 “명품 브랜드가 젊은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한 서브 브랜드 등 나름의 혁신 방향을 들고나올 것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예측되지 않는다”면서도 “소비자들이 자기 개성에 주목하고 자기 편집 역량이 커지는 등 시장이 성숙하는 현상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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