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November 28, 2024

루이비통 회장

 

LV, 두 글자의 힘은 강하다

조현욱 루이비통 코리아 회장



프랑스에서 루이비통이 여행용 가방(트렁크) 사업을 시작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한 것은 1854년이었다. 그로부터 137년 후인 1991년에서야 루이비통은 한국에 진출한다.

올해로 한국에 진출한 지 18년이 됐다. 국내에 진출한 명품업체 중 지난해 기준 매출 순위 1위는 어떤 회사일까? 예상대로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이었다.

금융감독원에 제출한 ‘2008 회계연도 감사보고서’를 보면 루이비통 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2812억 원이다. 2007년 매출 1690억 원보다 66% 늘어난 것이다. 루이비통 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액은 한국에 진출한 명품 혹은 럭셔리 제품 중 최고다.

이쯤 되면 루이비통 코리아를 누가 진두지휘 하는지 궁금해진다. 94년 비서와 단둘이 루이비통 코리아를 설립해 단 하나의 매장에서 7명의 직원으로 시작해 매출을 150배로 늘린 조현욱(46) 회장. 그는 그야말로 루이비통 코리아의 산 역사이자 증인이다.

그의 성공 비결은 무얼까. 지난해 매출 성과에 대해 먼저 물었다. 조 회장은 “물론 제가 앞장을 서지만 결국 루이비통의 브랜드 파워, 마케팅 파워, 제품 기획, 그리고 조직의 힘이 다 합쳐져 이룩된 것”이라고 겸손하게 한 발짝 물러선다. 필자와 마찬가지로 루이비통 프랑스 본사 회장도 한국 지사가 매년 매출이 급신장 하는 비결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조 회장에게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성공 비결은 그가 5년 전부터 인력 채용과 개발, 조직 관리에 공을 들인 데 있었다. 루이비통이라는 브랜드 파워와 제품력은 변하지 않는다고 봤을 때 조 회장은 브랜드를 관리하고 제품을 팔아야 하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고 판단하고 경영 전략의 초점을 인력과 조직에 맞췄다. “그렇게 꾸준히 해나간 게 한국에서 성공 신화를 만들어 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그는 진단한다. 그렇다면 루이비통의 인재상과 추구하는 조직 문화는 무얼까.

“루이비통의 기업문화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 마음이 열린 사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최근에 한 가지 더 요구하는 것은 매니지먼트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추구하는 기업문화는 출근하고 싶은 곳, 기분 좋게 일하는 곳, 부서 이기주의가 없는 곳, 다른 부서와 협력과 소통이 잘 되고 어려울 때 서로 위로해 주는 곳입니다.”

조 회장은 어떻게 루이비통과 인연을 맺었을까. 그는 외교관인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서 16년, 스위스에서 6년, 일본에서 3년, 홍콩에서 1년을 보냈다. 94년 프랑스 파리 소르본대에서 국제경제학 박사 과정을 거의 마무리할 즈음이었다. 논문만 제출하면 박사 학위를 따는 시점에서 그는 첫 직장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를 마음에 뒀다. 하지만 당시 한국은 이 국제 기구에 가입한 상태가 아니어서 취업이 쉽지 않았다.

첫 번째 입사 시험에선 낙방

그러던 중 루이비통의 영업사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했다 낙방했는데, 한 달 후쯤 본사에서 다시 통보가 와서 루이비통 회장과 직접 면접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당시 루이비통 회장은 재능 있는 외국인을 채용하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 인사 전략에 관심을 갖고 있던 터라 한국인 유학생에게 면접 기회를 주고 또 루이비통에서 일할 기회를 준 것이다.

이것이 조 회장의 인생 전환점이었다. 프랑스 본사에서 매장 근무부터 시작한 그는 몇 개월 후 그룹 회장의 미션을 받고 한국에 와서 루이비통 코리아를 설립하게 된다. 15년 전의 일이었다.

“본사 회장이 15년 전 조 회장을 직원으로 채용해 책임감과 자신감을 심어준 것이 루이비통에서 떠나지 못하게 한 원인이자 최고 책임자까지 올라가게 한 모티브가 됐죠. 이런 롤 모델을 이제는 직원들에게 되물려 줘 후배들이 모두 성공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저에게 투영된 루이비통 회장의 경영 스타일과 기업 정신을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조 회장은 루이비통 경영철학의 기본 정신을 ‘이노베이션, 크리에이티브, 패션(열정)’이라고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이노베이션, 크리에이티브는 제품에만 반영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루이비통에서는 재무, 인사, 인력 양성(HRD갎uman resource development), 물류 등 경영 전반에 반영시키는 것이 일반 기업과의 차이점입니다.”

루이비통은 ‘짝퉁’이 가장 많은 브랜드이기도 하다. 하지만 짝퉁조차 지금의 루이비통을 구축하는 영감을 줬다는 사실을 아는가. 루이비통의 이노베이션, 크리에티브 정신은 모든 사람이 익히 알고 있는 갈색 캔버스에 ‘L’과 ‘V’, 꽃과 별을 새겨 넣은 모노그램 패턴에서 찾을 수 있다.

1888년 당시 늘어나는 모조품을 방지하기 위해 비통의 아들인 조지(Georges)가 이를 개발했다. 가방에 반복적인 패턴을 표현한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모험이자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현대로 넘어와선 마크 제이콥스란 걸출한 미국 디자이너에 의해 멀티 컬러, 그래피티 등으로 변형되기도 했다. 무라카미 다카시 같은 현대 예술가의 터치를 통해 체리, 벚꽃 등 과감한 무늬가 가해져 젊고 창의적인 패션 아이콘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지금도 루이비통은 여전히 짝퉁과 싸우고 있다.

한국에서도 짝퉁이 많이 나돌아 상표와 지적재산권 전문 변호사를 고용해 카피 제품에 적극 대응하면서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루이비통의 또 다른 글로벌 마케팅 전략은 ‘일관성’에서 찾을 수 있다. 글로벌 제품 기획 회의를 통해 의견이 수렴되면 반드시 프랑스에서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이다(단가가 가장 낮은 국가에서 생산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최고 경영진에서 거절했다 한다).

루이비통은 생산 단가가 높아도 절대적으로 ‘메이드 인 프랑스’를 고집한다. 최근 루이비통은 제품 생산에서 융통성을 발휘해 패션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는 구두, 의류와 선글라스를 만들고 스페인에선 지갑 등 가죽 제품을 제작하고 있다.

“‘메이드 인 루이비통’이란 절대 원칙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루이비통이 선글라스 시장에 진입했을 때 대부분의 명품 브랜드들이 선글라스를 주문자상표부착(OEM) 생산을 했지만 우리는 직접 생산하는 방식을 채택했죠. 제품 생산과 관리에 있어 루이비통은 모든 제품이 ‘메이드 인 루이비통’인 동시에 ‘메이드 바이 최고급’라는 일관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루이비통은 물건이 아닌 꿈을 판다

루이비통의 상징인 ‘모노그램 캔버스’는 디자인의 일관성을 보여 주는 단적인 예다. “저는 직원들에게 매출을 얼만큼 달성하라고 목표를 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동종 업계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지키라는 미션을 줍니다. 또 직원들에게 루이비통 코리아의 약점을 찾아서 개선하라고 합니다.”

루이비통의 가방 제품 관련 국내 시장 점유율은 2위에서 5위 업체의 매출을 합친 것만큼 될 것이라고 조 회장은 추측한다. 이 말을 달리하면 루이비통의 국내 시장 점유율이 40~50% 내외일 것이라는 산술적인 통계가 나온다. 조 회장은 “매출을 늘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브랜드 이미지를 훼손하지 않는 것이다.

억 만금이 눈에 보인다 해도 브랜드 이미지와는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경쟁사 제품에 대해 묻자 예상 밖의 말을 한다. “우리의 경쟁 브랜드는 없다고도 할 수 있지만 모든 명품 브랜드가 경쟁 제품들일 수도 있습니다. 백화점 명품 코너에 간 고객이 루이비통 제품을 구매하지 않는 것 자체가 우리에게는 경쟁적 요인입니다.”

그의 말에서 약간의 오만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만큼 자신감과 자부심이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루이비통 코리아의 산 역사로서 그동안 특별한 성과를 보면 결코 과장으로만 들리지는 않는다.“루이비통은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꿈을 판다”고 말했을 때 조 회장은 이미 루이비통의 경영 전도사이며 루이비통 DNA가 몸 속에 복제돼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사회학자인 장 보드리야르는 “현대인은 물건의 기능보다도 ‘기호’를 소비한다”고 말했다. 사회학 혹은 현상학에서 ‘기호’가 갖는 의미는 다양하지만 경영학의 마케팅 측면에서 볼 때는 곧 브랜드를 뜻한다. 루이비통은 기능성 제품 혹은 패션성 제품을 파는 것을 넘어서 장 보드리야르가 지적한 물건의 기호를 이미 1세기 전부터 팔고 있었으며 지금은 꿈을 파는 기업이 된 것이다.

87년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는 루이비통을 인수했다. 아르노는 자신이 소유한 최고급 샴페인 모에 샹동(Moet Chandon), 헤네시(Hennessy)를 루이비통과 합쳐 ‘LVMH’를 창립했다. LVMH는 패션, 화장품, 향수, 주류, 시계, 보석 등 최고급 브랜드 60여 개를 거느린 세계에서 가장 큰 명품 그룹이다.

Wednesday, June 5, 2024

korean in MBS

  A 31-year-old tourist from South Korea was sentenced to six months' jail on Wednesday (May 24) for stealing S$29,000 from her friend and losing it all at the gambling tables of Marina Bay Sands’ casino.

Song Hayan, who was here on a social visit pass, pleaded guilty to committing theft earlier in the month after her arrest on April 21.

The South Korean arrived in Singapore on April 17 with her friend Bae Jiyoon, 30, for a holiday. They first stayed at Equarius Hotel on Sentosa Island, before checking into a hotel at the Marina Bay Sands integrated resort.

On the afternoon of April 21, Bae left the hotel room to go shopping on her own while Song was asleep.

A few hours later, Bae returned to her hotel room and Song was not around.


She proceeded to look for a transparent bag she had that contained S$29,000, which she had placed underneath the clothing in her luggage.

State Prosecuting Officer (SPO) Lim Yeow Leong told the court that Bae was not able to find the bag even though she had seen it earlier before she left.

She noticed that someone seemed to have rummaged through her clothing and searched her luggage. 

She then called Song's mobile phone, but her calls went unanswered. She then went to look for Song at the casino in Marina Bay Sands, but could not find her.

The court heard that Bae eventually decided to post on her Instagram account, tagged Song’s account in the post, and urged Song to return the money because she believed that her friend had taken it.

Shortly after that, Song called Bae and asked to meet her at the first level of the casino.


When they met, Song was holding onto Bae's empty transparent bag. She admitted that she took the money and lost the full amount while gambling at the casino.

SPO Lim said investigations later revealed that Song knew Bae was in possession of a huge sum of cash and had searched her luggage to steal the money when Bae was out shopping.

No money has been recovered and no restitution has been made by Song to Bae.

On Wednesday, Song, who was not represented by a lawyer, apologised and tearfully pleaded with the court for leniency. She asked the court to "forgive" her this once and allow her "to go back to Korea".

She added that since her arrest, she has been having "a difficult time" in prison as she was unable to communicate with anyone. 

In delivering his sentence, District Judge Kenneth J Chin told Song that theft offences are taken seriously here and that her sentence "must reflect" that she stole a large sum of money.


However, he took into account her early plea of guilt and accepted that it was a "reflection" of her genuine remorse.

The judge told her he hopes that this episode will "serve as a lesson" to her after she is released, because Singapore has "zero tolerance" towards crime.

For committing theft, Song could have been jailed up to seven years and fined.

카이스트 비위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소속 포닥(박사 후 연구원)이었던 30대 미국인이 미성년자를 비롯해 다수의 여성들과 성관계를 하고 인증샷 등을 동의 없이 온라인에 유포한 혐의로 고발당한 것으로 파악됐다.

29일 법조계 등에 따르면 경찰청은 지난 27일 미국인 A(32)씨의 미성년자의제강간 및 불법촬영물 유포 등 혐의 고발 사건을 대전경찰청 대전둔산경찰서에 배당했다.

미국인 A씨는 2022년 9월부터 카이스트에서 포닥으로 재직할 당시 대전 일대에서 데이팅 애플리케이션(앱)을 통해 만난 다수의 한국 여성들과 성관계를 하고 이를 여성들의 동의 없이 사진과 함께 인증글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유포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고발장에는 그가 SNS에 올린 '나는 아시아 여자를 끌어당기는 자석이다' '한국 여자들은 나를 페티쉬화해준다' '한국 여자라고 부드럽게 대하지 않을 거야' 등 한국 여성들을 성적으로 희롱하는 발언 등이 담겼다.

이에 더해 '18세 미성년자를 성폭행했다'는 내용의 글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SNS는 현재 규칙 위반으로 이용중지된 상태다.

A씨에 대한 비위를 제보받은 카이스트는 지난해 3월 근무태만 등 사유로 해고했다.

이후 A씨가 연구실에서 사용하던 컴퓨터를 무단 반출하고 훼손하자, 한 카이스트 관계자는 지난 1월 그를 업무방해 및 전자기록 등 손괴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A씨는 경찰에 고소장이 접수된 이후 해외로 출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에도 자신의 SNS에 지속적으로 학교에 대한 비방 글을 올렸고, 이에 불법촬영물 유포 등 혐의로 추가 고발에 나섰다는 것이 또 다른 카이스트 관계자의 설명이다.

카이스트 한 관계자는 "A씨가 억울한 해고라고 신고했는데 노동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자 학교에 대한 욕설을 하고 다닌다"며 "한국에 잠시 온다고 하는데 경찰이 재빨리 출국금지 조치해야 한다"고 말했다.

뉴시스는 A씨의 해명을 듣기 위해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으나 닿지 않았다.